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천광암 칼럼]44조 원 투자 선물과 55만 명 백신 지원

입력 | 2021-05-24 03:00:00

韓 44조 투자에 바이든 “생큐 생큐 생큐”
강력한 협상 지렛대 활용 못 한 백신외교
박수와 크랩 케이크로는 못 채울 손실감




천광암 논설실장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풍경은 지난달 16일 미일 정상회담과는 사뭇 달랐다. 오찬 메뉴가 햄버거에서 크랩 케이크로 ‘격상’됐고 식탁 배치도 바뀌었다.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2m 정도의 긴 직사각형 테이블 양 끝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으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두 대통령이 서로 팔을 뻗으면 손끝이 닿을 수 있는 작은 원탁을 놓고 마주했다. 공동회견도 대조적이었다. 미일 정상의 회견은 시종 딱딱했던 반면, 한미 정상의 회견은 부드러운 분위기에 유머가 넘쳤다.

여기에는 4대 그룹이 준비한 44조 투자 패키지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동회견에 참석한 한국 기업인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청한 뒤 박수갈채와 함께 “생큐”를 3번이나 연발한 대목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런 장면은 과거 다른 한국 대통령의 회담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다.

역대 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은 늘 ‘을’이었고, 미국 대통령은 ‘갑’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는 원조와 차관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것이 한국 대통령의 숙제였다.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때는 시장 개방 압력을 버텨내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미국의 날 선 공세에 귀를 막은 채 “덜 익은 사과(한국 시장)를 따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버틸 때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투자를 애걸해야 하는 처지였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국가신용등급 악화 때문에 방미길이 편하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큰 부담도 없었고, 기업들이 대통령을 위해 별도의 ‘선물’을 준비해야 할 일도 없었다.

대형 선물 보따리가 등장한 것은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에서다. 당시 방미에 동행한 경제사절단은 ‘15조 원 투자+26조 원 제품구매’를 약속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2017년 11월 방한 때는 ‘19조 원 투자+63조 원 제품구매’ 패키지를 안겼다. 문 대통령은 한국 기업들이 피땀으로 일군 자본과 기술의 결실을 외교무대에서 ‘마이너스통장’처럼 빼 쓰는 행운을 누린 첫 한국 대통령인 셈이다.

물론 44조 원을 순전한 비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기업들로서는 투자액보다 훨씬 큰 수익을 기대하고 내린 결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 가능성이 큰 미국 시장을 선점한다는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기업인들에게 “생큐 생큐 생큐”를 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 등에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자력만으로는 달성할 길이 없다. 미국으로선 반도체 분야의 강자인 삼성전자의 현지 투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배터리는 중국이 이미 시장을 석권한 상태다. 중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참여가 없으면 미국의 전기차 육성은 허무한 구호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기업의 투자에 대한 미국의 절절함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를 문재인 정부가 협상에 제대로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남는다. 이번 회담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해서 양국은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모더나와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했고, SK바이오사이언스는 노바백스와 연구개발 양해각서를 맺었다. 긴 안목에서 안정적인 백신 공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은 당장 눈앞의 백신 가뭄 해소가 급한 처지다. 백신 물량 부족으로 지난 3주간 신규 접종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접종률도 아직 1차 7.4%, 2차 3.4%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해법으로 기대를 모았던 백신 스와프는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직접 지원을 확약받은 백신은 국군 장병들에게 접종할 55만 명분이 전부라고 한다. 미국이 지금까지 해외에 지원하겠다고 밝힌 8000만 회분의 물량과 그동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풀었던 기대치에 비춰보면 실망스러운 결과다.

문 대통령은 “회담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면서 “기대 이상”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세 번의 “생큐”와 박수갈채, 그리고 크랩 케이크 오찬으로 달래기에는 44조 원짜리 선물 보따리에 대한 손실감이 너무 큰 제72차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