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사진 왼쪽의 기계가 암호해독기 ‘봄’이다. 영화사 하늘 제공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숫자로 구성된 암호는 시간만 있으면 결국 푼다. 금방 풀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시도해도 답을 찾지 못할 만큼 숫자의 조합이 많은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암호를 뚫으려는 창과 달리, 침입자를 막으려는 방패는 암호를 풀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숫자에 더하여 문자까지 사용하면,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기 위해 시도해야 할 경우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암호는 잠겨 있는 휴대전화나 문을 여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는다. 비밀 통신에도 활용된다. 스파르타나 로마가 전쟁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여 명령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로 이 시기에는 문자를 다른 문자로 바꾸는 식이었다. 가령 알파벳 ‘A’는 두 글자 뒤의 ‘C’로 바꾸고, ‘C’도 역시 두 글자 뒤의 ‘E’로 바꾸는 식이다.
휴대전화의 비밀번호에는 0부터 9까지, 총 열 개의 숫자가 사용된다. 손가락이 열 개인 탓이다. 하지만 컴퓨터는 다른 방식으로 숫자를 이해한다. 회로에 전기가 흘러서 전구가 켜지면 1, 꺼지면 0의 손가락이다. 그래서 전기가 흐르는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가 아니라,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성질을 갖는 반도체를 사용하여 필요에 따라 전기를 흘렸다가 끊는다. 하나의 전구는 0 또는 1 중 하나만 표시한다. 그런데 아주 작은 미시의 물질세계로 들어가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양자(quantum)역학의 법칙이 적용된다. 여기에서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구글이 개발한 양자컴퓨터에 활용된 ‘시커모어’칩.
이러한 양자 기술은 창과 방패 모두가 활용한다. 단지 톱니바퀴 몇 개가 들어있던 에니그마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톱니바퀴로 발전한다. 한편 무척 빠른 양자컴퓨터는 복잡하게 조합된 암호의 방정식도 재빨리 계산해낸다. 첨단 기술이 서로 맞부딪혀 끝장 전쟁을 하는 셈이다. 과연 뚫느냐, 막느냐의 싸움은 끝이 있는 것일까?
양자 기술은 국가 안보와도 맞물려 여러 국가와 글로벌 기업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얼마 전 구글은 슈퍼컴퓨터가 1만 년 걸릴 계산을 200초 만에 끝내는 양자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양자암호와 해독기가 당장 세상에 등장할 수준은 아니다. 구글이 발표한 기술은 특정한 문제에 제한적으로 양자컴퓨터를 적용한 것이다. 즉 다른 문제는 아직 200초 만에 풀 수 없다.
암호라는 건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에 뚫리지 않는 암호란 없다는데,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암호를 해체할 수도 있다. 에니그마가 활약하던 대서양 반대쪽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인디언을 암호병으로 활용했다. 이들이 쓰는 말은 소수의 통역병을 제외한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외계어였다.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암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파트 대문의 숫자 자물쇠에 고압의 전기를 흘려서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했고, 아예 대문을 떼어내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마스크가 일상화된 요즘, 얼굴을 인식해서 잠금 화면을 풀어주는 휴대전화가 마스크 쓴 얼굴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매가 닮은 자식이 마스크를 쓰고 부모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면, 잠금 화면은 맥없이 해제된다. 뚫느냐, 막느냐의 다툼은 언제 끝날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전쟁이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