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김정은이 4월 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뒤 4월 15일 ‘태양절’ 참배도 하지 않고 20일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된 해프닝이었습니다. 5월 1일 김정은이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면서 해프닝은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이후 김정은이 더 오래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노동신문이 5월 24일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지도했다고 보도하기까지 무려 23일 정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보에 혼이 난 한국 언론들은 더 이상 김정은의 긴 잠행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습니다. 4월 11일부터 계산하면 김정은은 40여 일 동안 딱 한번 얼굴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명색이 국가 지도자인데 너무나 게으른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김정은은 4월 13일 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뒤 5월 24일까지 42일 동안 딱 세 차례만 잠깐 얼굴을 선보였습니다. 15일 태양절 참배와 기념공연 관람, 4월 29일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제10차 대회 참가자들과의 기념촬영, 5월 6일 조선인민군 군인 가족 예술소조(예술팀) 공연 관람이 전부입니다. 42일 동안 공개행보는 공연을 두 번 보았고,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참배와 기념촬영이 전부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꼭 공개 행보를 해야 하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솔직히 어느 국가 지도자가 2년 연속으로 42일 동안 3번 이내로 얼굴을 드러낸다면 당연히 일을 하지 않는다며 논란거리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최근 2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봄만 되면 김정은의 공개행보가 현저히 줄어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봄이 오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올해는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NK뉴스가 분석한 인공위성 사진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NK뉴스는 10일 김정은의 원산 별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전날까지 계류장에 정박해 있던 60m 길이의 대형 요트가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인 듯 바닷가로 옮겨졌다고 보도했습니다.
NK뉴스에 따르면 이 배가 원산 별장 주변 사진에 찍힌 건 2017년 이후 총 19번인데, 이중 15번이나 김정은의 원산 일대 방문 시기와 겹쳤습니다. 이는 김정은이 원산에서 호화 휴가를 즐기다가 한 번쯤 ‘나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밖에 나와 돌아봤다는 의미입니다. 북한 언론에선 이것을 현지시찰로 보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태는 김정일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김정일이 지방 현지시찰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대개는 그 주변에 김정일의 호화 별장이 꼭 있습니다. 즉 시찰을 위해 그 지방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그곳 별장에 놀러 갔다가 바람도 쏘일 겸 근처 공장이나 농장, 군부대를 한번쯤 돌아보는 것입니다. 김정은의 최근 행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김정은 집권 이후 달라진 것이라면 원산 인근에 대한 시찰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산 별장에 워낙 많이 가다보니 원산 인근 시찰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김정은이 계속 원산에만 집중해 찾아오니 강원도 간부들이 긴장돼 죽겠다고 하소연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김정은이 원산을 즐겨 찾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은 원산 송도원야영소 강 건너편에 있는 원산 특각(602초대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정은이 태어났던 1984년은 김일성이 생존해 있을 때였습니다. 김정일은 아버지에게서 본처 김영숙 외에 다른 여성과 애를 낳고 살고 있다는 ‘불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용희는 멀리 원산에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다른 때는 몰라도 올해는 호화로운 봄 휴가를 즐기면 안 되지 않을까요.
인민들은 고생길에 내몰고, 자신은 호화휴가를 즐기는 것 아닌가요.
지금 북한 주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삼재(三災)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선 강력한 유엔의 경제 제재와 코로나로 인한 셀프 봉쇄로 북한 내부 경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수입품 물가가 치솟아 인민은 잡곡 외에 다른 생필품 소비를 극력 줄이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의 경제사정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 긴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인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동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원래 북한은 5월이면 전국이 농촌지원에 동원됩니다. 연료난에 시달리는 북한은 사람의 인력으로 모내기와 옥수수 심기를 진행합니다. 이때 도시 사람들도 농촌에 동원되다보니 거리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학생들도 대략 14세 이상부터는 40~50일 동안 공부를 중단하고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짓습니다.
거기에 더해 올해 평양의 사정은 더욱 어렵습니다. 농촌지원도 나가야 하지만, 평양시 5만 세대 공사를 벌여놓았기 때문에 아파트 공사장에도 다녀야 합니다. 아마 평양 시민 대다수가 각종 동원에 정신 차릴 틈이 없을 겁니다.
인민은 동원에 내몰고 채찍질하고 김정은은 호화보트에서 비싼 술을 마시며 낚시를 즐기는 것 아닐까요.
세 번째는 강력한 공포통치가 시작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정은은 올해 각종 대회에 참가해 반사회주의와의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반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 현상은 일심단결을 저해하는 악성종양”이라고 규정한 뒤 “중앙으로부터 도·시·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연합지휘부를 조직해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와 투쟁을 통일적으로 장악하고, 집중적으로, 다각적으로 강도 높이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장사도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 현상이 되는 북한에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이 누명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김정은은 강력한 비사회주의 투쟁을 선포한 뒤 곳곳에서 사람들을 체포해 반사회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총살하게 되면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고 체제에 대한 불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타산한 것이죠.
흔히 통치자들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는 것을 즐깁니다. 그런데 지금 호주머니가 텅 빈 김정은의 손에는 당근이 없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대규모 강제동원이라는 채찍과 찍소리도 못 내게 만드는 처형이라는 공포입니다.
김정은은 공포와 처형의 통치로 회귀하면서 나름 두려운 것도 있나 봅니다. 바로 잔인한 처형이 시시각각으로 한국 언론과 외신에 보도돼 자신이 악당으로 더욱 부각되고 조롱받는 것이죠.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은 최근 보위성에 “외부와 연락하는 자들은 끝까지 찾아내 엄중히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위성과 보안성 등 공안당국은 최근 국경일대에 역량을 총동원해 외부와 전화연락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관심이 집중됐을 때 성과를 내야 점수를 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 작전을 ‘참빗작전’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빗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옛날 머릿니와 서캐에 시달리던 가난한 시절 참빗은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을 샅샅이 흩어 머릿니와 서캐를 잡듯이 외부와 연락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겠다는 것이 공안당국의 각오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참빗전술’을 일본군 토벌대가 쓰던 전술이라고 가르칩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등장하는데, 일본군이 1930년대 말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빗전술’을 쓰는 바람에 숱한 동지들이 죽었다고 회상합니다. 일본군은 수만 명을 동원해 산을 골짜기부터 능선까지 샅샅이 수색해 항일연군을 색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썼다는 참빗전술을 백두혈통이라는 김정은이 인민을 상대로 쓰겠다니, 인민들 속에서 “우리가 독립군이고, 너희는 일본군이냐”는 불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잔치에 참가해 읊은 시가 떠오릅니다. 북한 사람들도 이 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
옥반가효 만성고(玉盤佳肴 萬姓膏)
촉루락시 민루락(燭淚落時 民淚落)
가성고처 원성고(歌聲高處 怨聲高)
이 시를 북한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금잔의 맑은 술은 천백성의 피요
옥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