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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미성년자에 부모 빚 상속시켜 억대 빚쟁이 만드는 현행법

입력 | 2021-05-25 00:00:00


물려받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 개인파산을 신청한 미성년자가 2016년부터 올해 3월까지 8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법에는 부모·조부모 등이 남긴 빚이 너무 많으면 상속한 재산의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승인, 재산과 빚 모두 상속을 하지 않는 상속포기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뒤늦게 상속된 채무를 알게 됐을 때 소송을 통해 한정승인을 하는 특별한정승인 제도도 있다. 하지만 미성년자의 경우 친권자 등 법정대리인이 법을 잘 몰라서 제때 신청하지 않았다면 빚이 상속되는 것을 돌이킬 방법이 없다.

현행법에서 빚이 무조건 상속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둔 이유는 상속인이 본인의 잘못이나 의사와 무관하게 물려받은 빚에 무한책임을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작 사회가 적극적으로 보살펴야 할 미성년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남긴 억대의 빚을 상속받은 고교생 아들, 어머니가 빌린 수천만 원 빚을 8세에 떠안은 딸의 사례까지 있다. 이들은 아무런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법의 맹점 때문에 헤어나기 힘든 빚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상속 때문에 빚더미에 앉은 아이들이 빚을 갚지 않을 방법은 개인파산을 신청해서 면책을 받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파산 선고를 받으면 빚이 탕감되는 대신 은행 거래나 신용카드 발급이 어려워지고, 공무원이나 교사도 될 수 없게 되는 등 불이익을 받는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채무를 상속한 미성년자는 다른 제도로 보호할 방도가 없다”며 “개인파산 신청을 할 수는 있겠지만 신용불량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라는 제안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미성년 상속인의 법정대리인이 상속을 승인하거나 포기하기 전에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하거나, 미성년자의 상속에서는 한정승인을 원칙으로 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미성년자가 상속받은 재산보다 빚이 많을 경우 상속 재산 내에서만 빚을 갚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도 최근 발의된 만큼 국회가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다. 물려받은 빚에 절망한 아이의 입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사느냐”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도록 법적 안전망을 만들 책임이 정부와 국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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