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증오범죄방지법에 서명했습니다. 주요 아시아 동맹국인 한국과의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서명식이라 의미가 깊었습니다. 서명식과 이후 열린 리셉션에서는 아시아계 정치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법안 통과 과정을 되돌아보며 감회를 밝혔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정부 지침 이후 열린 백악관의 첫 대형 행사여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아시아증오범죄방지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쥬디 추 하원의원, 바이든 대통령, 그레이스 멩 하원의원, 메이지 히로노 상원의원. 백악관 홈페이지
그 자리에는 인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아시아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57)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해리스 부통령을 말할 때 아시아계라는 점은 별로 부각되지 않습니다. ‘해리스=흑인’이라는 공식이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시아계라는 것을 모르는 미국인들도 많습니다. 서명식에는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한 공로가 아닌,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미국 내 2000만 명에 달하는 급성장 커뮤니티인 아시아계는 그런 해리스 부통령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아시아계로서 행정부 최고위직까지 오른 그녀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한 일이 없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애틀랜타 총격사건 현장을 방문했을 때 “나도 아시아계다. 당장 아시아계를 향한 폭력을 멈춰라”는 식의 공감 가는 발언을 기대했지만 없었습니다. 미지근한 연설을 했죠.
“그 흑인 소녀가 바로 나다.” 해리스 부통령의 흑인 정체성을 이만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도 없습니다. 지난해 7월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토론회에서 그녀는 조 바이든 후보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이든 후보가 1960년대 흑백 인종 학생들을 버스에 같이 태워 등교시키는 이른바 ‘버싱 정책’에 반대했던 전력을 몰아붙이며 자신을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밝히는 장면이었습니다.
부통령이 된 뒤에도 흑인 커뮤니티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4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 런치카운터를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1960년 흑인 4명이 백인 전용 식당 공간에 앉아 침묵 시위를 벌였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또 알 샤프턴 등 흑인 운동가들과 TV 인터뷰에 자주 나서고, 백신 접종률이 낮은 흑인 커뮤니티에 접종을 독려하는 동영상에 출연했습니다.
해리스 부통령이 민권운동의 상징적 장소인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런치카운터를 방문해 1960년 당시 흑인들이 침묵 시위를 벌였던 곳을 둘러봤다. CNN
반면 아시아계를 위해서는 애틀랜타 사건 현장을 방문한 것 외에는 두드러진 활동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나라인 인도의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을 때도 별다른 언급이 없어 인도인들로부터 “차라리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리를 더 잘 챙겨줬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인도를 수차례 방문하고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미국에 모셔와 초대형 스타디움에서 연설 이벤트를 마련해주는 등 각별한 친(親)인도 정책을 벌였습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19세 때 미국에 유학 와서 결혼해 자신을 낳은 인도 어머니를 “나의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7세 때 부모가 이혼한 뒤 계속 어머니와 살았고 아버지와는 매우 드물게 만났습니다. 이런 성장 환경으로 볼 때 어머니 쪽인 아시아계에 친밀감을 느낄 듯하지만 오히려 흑인 정체성을 더 부각시킵니다.
인도 출신의 어머니 샤말라 고팔란과 어린 시절의 해리스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 자서전 ‘우리가 품은 진실: 미국의 여정’
미국에는 아직 ‘한방울 원칙(one-drop rule)’이 뿌리 깊게 남아있습니다.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흑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입니다. 주로 흑백 혼혈인들에게 적용되는 인종차별 시대의 잔재이지만 해리스 부통령 같은 흑인-아시아계 혼혈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겠죠.
그렇다고 해리스 부통령이 아시아적 특성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카멀라’라는 독특한 이름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연(蓮)’을 뜻하고, ‘데비’라는 가운데 이름은 힌두교 여신에서 유래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인도 쌀 요리인 ‘비리야니’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식석상이나 정치 행사에 등장하면 예외 없이 ‘흑인 해리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의 친한 친구인 유명 코미디언 하산 미나즈는 “해리스는 대다수 인도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다. 흑인으로 비쳐지기를 원한다”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다른 소수 인종들도 사회적 성공을 이뤘을 때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것이고,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차별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라는 흑인사회 특유의 인종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죠.
해리스 부통령 외할아버지의 생가가 있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힌두사원에서 올해 초 해리스 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기도회가 열렸을 때 모습. 폴리티코
미 언론은 해리스 부통령에 대해 70대 30 규칙이 적용된다고 비꼽니다. 대부분 시간은 흑인으로서의 자신에 투자하고 필요할 때는 아시아계에 “나도 당신들 중 한 명”이라고 구애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정치적 야망이 큰 그녀는 조만간 인종적 정체성을 확실히 ‘교통 정리’ 해야 합니다. 2024년 재선 도전이 불투명한 바이든 대통령은 벌써부터 해리스 부통령을 열심히 데리고 다니며 후계자 수업을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은 매우 복잡하고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닌다던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기회주의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됩니다. 해리스 부통령에게도 결정의 시간이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