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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경제안보시대’, 오원철 수석이라면 어땠을까

입력 | 2021-05-26 03:00:00

반도체 투자, 배터리 분쟁 늑장대응 실기
“산업 발전은 정부 책임” 죽비 맞았을 것




박용 경제부장

요즘 한국 산업정책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키를 쥐고 끌고 가는 모양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회의를 열고 삼성전자까지 불렀다. 한국 기업들로부터 44조 원 규모의 투자 약속까지 받아내고 ‘생큐’를 연발했다. 수천억 원의 소송비가 들어간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을 중재한 것도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서 법정다툼을 벌이는 데도 정부 관리들은 ‘기업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외면했다”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기업 간 분쟁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국가 전략산업과 주력기업이 연루된 일은 다르다. 미국은 일자리와 미래산업 경쟁력이 걸린 사안으로 보고 대통령까지 팔을 걷고 나선 게 달랐다.

저쪽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나섰는데 우린 산업통상자원부 실장 주재 반도체 대책회의를 반복할 만큼 산업정책의 감도 떨어진다. 용인 반도체 공장에 산업용수를 대는 것도 개별 기업이 할 일이라고 뒷짐 지다가 뒤늦게 K반도체 전략에 끼워 넣었다. 반도체 인력도 향후 10년간 3만6000명 육성한다면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난감한 대학 내 정원 조정과 임시방편의 계약학과 신설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 산업정책이 잘 돌아갔다면 기업 투자가 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2020년 국내 제조업의 해외직접투자(ODI)는 연평균 12조4000억 원,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는 4조9000억 원에 그쳤다. 한국 기업은 떠나고, 외국 기업은 이보다 덜 투자하니 매년 4만9000여 개, 10년간 총 49만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고 지난해 실업률을 4.0%에서 3.7%로 낮출 기회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대한민국은 1960, 70년대 한정된 자원으로도 정부 주도 중장기 산업정책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시장을 중시하고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진 세계화 시대엔 빛을 잃었지만 최근 경제와 안보를 연계한 자국 우선주의가 득세하는 ‘경제안보 시대’엔 정부 역할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산업부 전신인 상공부 출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끈 고(故) 오원철 대통령 제2경제수석이 기업 분쟁이나 전략산업 투자를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뭉개는 후배들을 봤다면 죽비를 쳤을 것이다.

5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산업을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건 정부에서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말”이라며 “공업을 발전시킬 책임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1960년대 상공부 공업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거쳐 1970년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아 한국 중화학기업의 초석을 놓았다. 전략 산업을 위한 예산을 따로 마련하는 ‘목돈 전략’과 거점 지역에 기업들을 집중시키는 ‘클러스터 전략’으로 한국 산업을 일으켰다.

서울대 공대 출신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인 그는 산업부 후배 공무원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연에 참석한 산업부 공무원 30여 명 중 이공계 출신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한 명에 불과했다. 그는 “전부 행정만 하는 사람들만 뽑아놓고 기술을 모르니까 나 같은 사람을 불러놓고 강의시키는 게 아니냐”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경제안보 시대라는 지금은 산업과 기술을 아는 관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30일은 오 수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요즘 같으면 그의 통찰과 열정이 그리울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