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 <2>해체된 가족에까지 남겨진 빚
“우진이(가명) 엄마는 백일도 안 된 애를 버리고 떠났어. 그런 애한테 있는지도 몰랐던 외할머니 빚을 갚으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나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란 족쇄로 빚만 떠안겼다. 우진이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다. 키도 할머니 정모 씨(77)만큼 자라 듬직하다.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는 할머니. 묵묵히 따라나서 할머니를 돕는 맑고 착한 아이다.
지난해 우진이는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열한 살짜리가 자칫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에 놓였다. 외할머니인 강모 씨가 2019년 6월 숨지며 빚만 잔뜩 남긴 탓이었다. 우진이를 버린 생모 송모 씨(41)는 기별도 없이 자기만 상속을 포기해버려 빚이 자식들에게 넘어왔다.
“1년 소송해서 겨우 빚 상속을 피했어. 어린 것을 빚쟁이로 만들 수야 없잖아. 그런데 뭔 놈의 법이 그렇답니까. 그 빚이 고스란히 형한테 갔대. 거기는 또 뭔 죄를 졌다고. 우리 잘못도 아닌데 괜히 걱정되고 미안합디다.”
국내 민법은 ‘당연 승계주의’ 원칙을 갖고 있다. 누군가 사망하면 재산이나 빚이 혈연을 타고 대물림된다. 본 적 없는 엄마건, 존재도 몰랐던 형제건 상관없다. 서류상 가족이면 빚은 기어코 따라붙는다. 배인구 변호사는 “가족의 해체가 흔해진 21세기에 친족이란 멍에로 빚을 물려받는 현행 민법이 바람직한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본 적 없는 외할머니, 떠나버린 엄마… 내가 왜 그 빚을?”
5일 리어카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 정모 씨(왼쪽) 곁에서 11세 손자 신우진(가명) 군이 함께 폐지를 주워 담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할머니, 이거 봐요. 여기 내 이름이 있네. 이게 뭐야?”
지난해 1월 8일. 서울에 사는 우진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법원 직인이 찍힌 서류라 조심스레 열어 보다 할머니 정모 씨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의 빚을 우진이가 갚아야 한다는 내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영문도 모르는 우진이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 친모가 어린 자식에게 빚 떠넘겨
박카스 한 박스 사들고 알음알음 찾아간 법무사. 사정 끝에 최소비용 50만 원만 받고 일을 맡아주기로 했다.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 금액도 정 씨에겐 감당이 쉽진 않았다. 정 씨는 “우진이를 위해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해 모은 쌈짓돈을 다 털었다”고 했다.
지난해 2월 상속포기를 신청한 뒤에도 난관은 이어졌다. 법률상 상속을 포기하려면 친권자가 나서야 했다. 우진이를 떠난 뒤 10년 넘게 연락 없는 엄마 송모 씨의 인감증명서와 동의서가 필요했다. 법원은 “해당 서류가 없으면 절차를 밟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할머니는 애가 탔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송 씨 행방을 알 길 없었다. 우진이 손을 부여잡고 서류상 주소지인 충북 청주에도 찾아가봤다. 집주인은 “한 달 전쯤 이사 갔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가 정 씨를 도왔다. 우진이의 딱한 사정을 알고 송 씨의 친권을 일시 정지하는 법적 절차를 밟아줬다. 길고 긴 상속포기 소송은 13개월 만인 올해 2월 25일 마무리됐다.
“빚이란 게 무섭습디다. 불쌍한 우리 애 살리려 급한 불을 끈 건데, 그렇게 달라붙어 옮겨갈 줄 누가 알았겠어? 얼굴도 모르지만 우진이랑 형제라는데. 그쪽 생각하면 두 발 뻗고 잘 수가 없네요. 자꾸 죄스러워서 눈물만 쏟아져.”
○ 있는지 몰랐던 동생 빚 떠안은 청년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뭐예요?”3월 10일 주환 씨는 창백한 표정으로 아버지 백모 씨(48)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친모인 송 씨가 낳은 남동생 우진이가 상속을 포기했다는 법원 서류였다. 그 바람에 주환 씨 역시 존재도 몰랐던 외할머니의 빚을 모두 떠안았다는 내용이었다.
주환 씨는 지금껏 동생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엄마란 사람 역시 세 살 때 사라진 뒤 생사도 몰랐다. 다만 주환 씨 몸엔 엄마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송 씨가 담뱃불로 자기 자식의 다리를 지진 자국이다. 백 씨는 그제야 가슴을 쳤다.
“실수했구나 싶었어요. 사실 지난해 1월 제가 법원 통지를 받았거든요. 애 엄마가 상속을 포기해 빚이 넘겨졌단 거였죠. 근데…, 차마 주환이한테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애를 워낙 학대해 엄마 얘기만 꺼내도 낯빛부터 변하는데. 어떻게든 혼자 조용히 해결해 보려 했던 건데. 이 지경이 될 줄 어찌 알았겠어요.”
주환 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보다 못한 엄마, 더구나 본 적도 없는 외할머니. 그 빚을 왜 내가 갚아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아직 실낱같은 가능성은 남아 있다. 우진이와 달리 주환 씨는 성인이라 ‘특별한정승인’ 소송을 해볼 수 있다. 특별한정승인이란 상속인이 빚을 인지한 시점부터 3개월 안에 신청하면 재산을 넘는 부채는 상속받지 않도록 구제해 주는 것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측은 “빚을 몰랐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쉽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가능성은 50%는 된다고 본다”고 했다.
‘빚의 사슬’… 사촌까지 상속포기 신청해야 면책
美-英선 상속집행자가 알아서 정리입법조사처 “친족 빚 확인 어려워 현실에 맞게 법개정 서둘러야”
“물려받은 빚을 포기하시려면 자녀와 배우자뿐 아니라 형제자매, 사촌까지 모두 함께 법원에 상속 포기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최근 한 법률 상담 사이트에 한 상속 전문 변호사가 띄운 안내 글의 일부다. 이 문장만 봐도 ‘빚의 대물림’이란 사슬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엿볼 수 있다. 현행 민법은 1순위인 자녀와 배우자를 시작으로 사촌 등 총 4순위에 걸쳐 상속인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영국 등은 미성년뿐 아니라 성인도 원칙적으로 빚을 물려받지 않는다. 개인이 생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재산을 처분할 집행자를 선임해두면 그가 알아서 재산 가운데 빚을 정리한다. 만약 유언을 남기지 않고 갑작스레 숨지더라도 사망신고 뒤 법원이 집행인을 지정해 재산에서 빚을 처분해준다. 주환 씨나 우진이처럼 얼굴도 모르는 가족의 빚을 덜컥 떠안을 가능성이 없다.
국회입법조사처의 김성호 조사관은 “친족에게 빚이 자동으로 대물림되는 현행 민법에선 망자의 빚을 조사하고 처분할 의무를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 반면 미국은 그 책임을 법원이 지정한 집행자가 진다”며 “현대사회에선 먼 친족이라면 빚이 있는지조차 확인이 어렵다. 현실에 맞춰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역시 지난해 11월 가족공동체가 해체된 현대사회에서 현행 상속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짚었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인 배인구 변호사는 “생전에 재산과 부채를 처분하는 방안을 마련해놓는 ‘유언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미국은 시민의 95%가 유언을 남겨 재산은 물론이고 부채까지 처분할 방안을 미리 마련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가 정착되면 행정비용도 줄고 상속인이 뒤늦게 빚을 떠안을 위험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다.
이소연 always99@donga.com·조응형·김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