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 1939년, 캔버스에 유채. ⓒ2018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송화선 신동아 기자
모란디는 평생에 걸쳐 병과 컵, 주전자와 그릇 등을 그렸다. 고향 이탈리아 볼로냐의 벼룩시장에서 화폭에 담을 물건을 구하고, 각각의 대상이 보기 좋게 놓일 때까지 수없이 배치를 바꿔가며 작업했다고 한다. 생전 인터뷰에서 모란디는 “특정한 색깔 식탁보와 어떤 병이 잘 어울릴지 결정하는 데 몇 주가 걸린다. 그 다음엔 병 그 자체에 대해 또 몇 주간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섬세하게 조율된 모란디 그림과 비교하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좀 더 격정적이다. 수많은 술병이 등장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인공 찬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장송행진곡’으로 알려진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러 사람 목소리가 뒤섞이고 술병이 우르르 쓰러진다. 그리고 정적. 장면이 바뀌면 찬실은 무채색 공간에 정물(靜物)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다. 힘없이 입을 벌린 채 허공을 응시하는 찬실 얼굴에 서린 건 오직 비탄의 감정뿐이다. 이런 찬실이 어째서 ‘복도 많은’ 사람이라는 걸까. 이때부터 관객은 영화 제목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 길 위에서 여러 번, 영화에 스며든 모란디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모란디는 자기 작업실에 쌓인 먼지를 절대 털지 않았던 걸로 유명하다. 미술사학자 존 리월드는 “모란디의 작업실엔 언제나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며 “벨벳처럼 부드러운 회색 먼지가 삐죽한 병과 깊은 그릇, 오래된 커피포트와 진기한 꽃병 위에 내려앉아 서로 다른 색채와 질감을 균질하게 만들어줬다”고 설명했다. 리월드가 ‘모란디의 먼지’를 태만이나 무성의의 결과가 아닌, (작품을 위한) 인내의 결실이라고 평한 이유다.
모란디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특유의 온화한 색조와 부드러운 붓선에서 모든 것을 부드럽게 덮어버린 먼지의 마술을 본다. 그리고 찬실은, 먼지 쌓인 빈 방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던 존재와 마주하며 새로 시작할 용기를 낸다.
어쩌면 김초희 감독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연출하며 모란디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선 “현실보다 더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는 모란디의 말이 울렸다. 찬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밑바닥에서, 추상적인 고민과 초현실적인 미래를 만난다. 정물 구상을 통해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 모란디처럼 말이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