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조선왕실의 기도터 계룡산
고종과 명성황후의 배려로 지어진 계룡산 중악단. 명성황후가 이곳 계룡산신에게 기도해 아들(순종)을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묘향산 상악단, 지리산 하악단과 함께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3대 사전(祀典)에 드는 중악단은 1999년 보물로 지정됐다.
《1871년 고종의 왕비이자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명목만 국왕이지 실권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뺏긴 남편의 처지도 딱하려니와 그해 11월 왕위를 이을 아들마저 생후 5일 만에 잃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아예 고종과 궁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세자를 배출하지 못한 왕비는 권력에서 밀려나게 마련이다. 명성황후는 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기도의 대상은 바로 ‘영험한’ 계룡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염원이 녹아 있는 계룡산에서 명성황후는 득남(得男)과 왕실의 번영을 빌었다. 계룡산은 조선 왕조의 창업과 몰락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무대이자 온갖 전설과 신화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계룡산 남쪽 자락에 있는 중악단(中嶽壇·공주시 계룡면)과 제석사(계룡시 신도안면) 등이 특히 그러한 곳이다.》
○계룡산 자락의 작은 궁궐
명성황후가 기도한 장소로 알려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 자락의 신원사 중악단을 찾았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때인 651년 고구려 출신 승려인 보덕화상이 창건한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 무학대사에 의해 크게 중창됐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이곳에 산신각(현재 중악단)을 지어 계룡산신에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는 전설도 뒤따른다.
명성황후 또한 선조들의 뒤를 따랐다. 황후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덕분일까. 1873년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을 섭정에서 끌어내리고 남편 고종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이듬해인 1874년 3월 아들(순종)을 낳는 경사를 맞았다.
고종도 계룡산신을 모신 신원사를 각별히 대우했다. 고종은 1880년 “신원사는 다른 절과 다르니 중수하는 일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이라는 신하의 요청에 따라 공명첩(空名帖·국가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받고 형식상의 관직을 부여하는 백지 임명장) 500장을 하사해 기금을 모으도록 조치했다(승정원일기).
이듬해인 1881년에는 계룡산신을 위한 중악단이 건립됐다(중악단 상량문). 앞서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의 배려로 중악단이 건립됐다는 기록(1959년에 발간된 ‘공주군지’)도 있는데, 대략 1880년 전후로 중악단 설립 계획 및 건설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악단은 예사로운 명칭이 아니다. 그전까지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은 계룡산사(鷄龍山祠), 계룡단(鷄龍壇)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제단이 공식적으로 중악단으로 불리게 되면 국가 차원의 제단으로 위상이 격상된다. 이후 계룡산 중악단은 북한 쪽의 묘향산 상악단(6·25전쟁 때 소실 추정), 남쪽의 지리산 하악단(소재 불명)과 함께 조선의 3대 사전(祀典) 장소가 됐다.
첫 번째 솟을대문을 지나면 좌우로 행랑채 비슷한 요사채가 있는데, 왕 혹은 왕비가 오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구전은 명성황후가 중악단에서 머물다 갔다고 전하는데, 명성황후 본인이든 황후의 명을 받든 내명부 궁인이든 이곳에서 치성을 드린 것은 분명하다. 궁중에서 쓰는 물품 목록 등을 기록한 ‘궁중발기’에 신원사에서 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중악단의 팔작지붕 위 네 귀퉁이에는 사람과 동물 형상의 잡상(雜像)이 각각 7개씩 올려져 있다. 나쁜 기운이나 살(煞)을 막는 장치인 잡상 역시 경복궁 창경궁 등 궁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장식 기와다.
경복궁 교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꽃담도 있다. 중악단을 둘러싼 4면 담장은 궁궐 양식인 꽃담으로 치장돼 있다. 만수무강(萬壽無疆)과 수복강녕(壽福康寧)이란 전서체 한자가 꽃담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중악단은 1999년에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됐다. 현전하는 산신각 중 최대 규모라는 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국가 차원의 제단이라는 점, 토속 신앙과 유교적 건축 양식의 조합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국태민안만 기도하는 계룡대 제석사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초석 석재(충남유형문화재 66호).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이 깃든 괴목정을 한 화가가 그리고 있다. 괴목정은 나무가 크고 웅장해 정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괴목정뿐만 아니다. 계룡대 영내에 있는 제석사는 맞은편 산자락의 계룡산 삼신당과 함께 이성계의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삼신당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기도처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제석사는 이성계가 신도안을 조선의 도읍지로 삼기 위해 기도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제석사 뒤쪽 자연 석굴이 바로 그 설화의 무대다.
제석사 뒤편 용구추(龍口湫)로 불리는 바위 동굴.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으로 정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던 장소로 알려졌다.
신도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석사는 마치 선경(仙境) 세계로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계룡산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암용추와 숫용추가 절 좌우에서 호위하듯 두르고 있고, 주위 산들과 기암괴석이 갖가지 동물 형상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석굴 암반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고인 약수는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듯하다. 사찰이지만 마치 도교의 무릉도원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계룡대 영내에 있는 제석사 각왕전(覺王殿). 이 법당에서는 오로지 국태민안과 평화통일 등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룡대 관할 지역인 이곳에서 제석사가 어떻게 남아 있을까. 1983년 3군 본부 이전 사업인 ‘6·20사업’으로 신도안에 거주하던 6300여 명의 민간인과 130여 종교단체가 철거됐다. 당시 이 절을 지키던 해봉 스님(2015년 입적)은 제석사가 국가의 안녕만을 기도하는 특수한 도량임을 들어 사찰을 수호했고, 군 당국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재 제석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1년에 단 한 차례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에만 사찰을 개방하고 있다. 기도발이 남다른 곳으로 알려진 제석사에서 기도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라고 한다.
제석사, 괴목정 등이 들어선 신도안은 한때 각종 무속신앙과 신흥종교의 요람으로 꼽혀 왔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도참서 ‘정감록’ 등에서 미래 800년 신도읍지로 신도안을 꼽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계의 계룡산 천도 계획이 무산된 후 한양에 도읍지를 마련한 조선은 문을 닫을 때까지 ‘계룡산 정씨 왕국 도읍설’에 시달렸다. 이씨의 나라가 아닌 새 나라, 새 시대를 열망하는 민중은 계룡산 왕국설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신도안은 일제강점기엔 일본을 배격하고 새 나라 건국을 꿈꾸던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대에서도 수도 이전론이 거론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언급되는 곳 또한 계룡산 일대다. 이처럼 계룡산은 역사와 신비한 전설. 미래 비전이 혼재하고 있는 특이한 여행지다.
글·사진 공주=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