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베르 참사관과 한 바퀴 돌아보니 한국전 가평전투 전사자부터 조선독립 힘쓴 스코필드 박사까지 캐나다인의 발자취 자세히 소개 “대사관밑 530살 회화나무 뿌리, 양국 우정의 깊이 말해줘”
주한 캐나다대사관의 상징물인 530년 된 회화나무(뒤)를 배경으로 선 패트릭 헤베르 참사관. 정동길 가이드로 나선 그는 “한-캐나다 우정을 되짚어 보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정동길은 우정의 길입니다.”
걷기 좋은 길, 덕수궁 돌담길, 향긋한 5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는 길(노래 ‘광화문연가’ 중에서)…. 서울 중구 정동길을 부르는 별칭은 많다.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정치 경제 문화 분야를 총괄하는 패트릭 헤베르 참사관(50)에게 정동사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811m 정동길은 양국 우정의 길이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다소 부담스럽다면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길’이라는 게 그의 추천사다. 1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정동길을 헤베르 참사관과 함께 한 바퀴 돌았다.
캐나다가 6·25전쟁 참전국 중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2만7000여 명의 군인을 보낸 나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기 연천 고왕산 355고지를 사수하는 전투에서는 200여 명의 캐나다군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잊었지만 캐나다는 매년 이들 전사자를 기억해 왔다. 올해는 가평전투 70주년을 맞아 기념사진집을 발간하고 당시 참전했던 캐나다 전쟁화가 테드 주버의 작품 ‘가평에서 버티며(Holding at Kapyong)’를 전시하는 등 행사 규모가 커졌다.
헤베르 참사관은 다음 코스로 교회당(정동제일교회) 부근에 있는 ‘보구여관터’라는 작은 표지판 앞으로 안내했다.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장소’라는 의미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이 있던 자리다. 캐나다 ‘슈퍼우먼’ 로제타 셔우드 홀이 활약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과 캐나다는 1963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처음 캐나다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은 때는 훨씬 전이다. 1888년부터 1945년까지 200여 명의 캐나다인이 선교사 학자 의사 기자 등의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1890년 도착한 의사 로제타 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미국 출신이었지만 캐나다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캐나다인이 됐다. 여성이 제대로 병원에조차 갈 수 없던 시절에 그녀는 보구여관의 안주인으로 하루 수십 명씩 밀려드는 한국 여성들을 진료했다.
우정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라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정동사거리에 있는 돈의문박물관마을 안에는 스코필드 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헤베르 참사관과 함께 기념관에 들어서니 호랑이 한 마리가 맞아준다. 한국 애칭인 ‘석호필’(호랑이처럼 굳건하게)로 불렸던 스코필드 박사를 기리는 실물 크기 호랑이상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생전에 “강자 앞에서는 호랑이처럼, 약자 앞에서는 비둘기처럼 행동하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3·1운동 현장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 세계 각국에 타전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조선 발전을 위한 제언’이라는 기고를 남기기도 했다.
1867년 건국한 신생 독립국 캐나다는 먼 타국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는 스코필드 박사에게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금도 토론토 동물원에 ‘한국의 34번째 민족대표’라는 표지판과 함께 그의 동상이 서있다.
정동길 역사 순례는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와 530년 된 회화나무 앞에서 마무리됐다. 헤베르 참사관은 “정면이 아닌 측면 방향으로 설계된 대사관의 독특한 디자인은 서울시 지정 보호수인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