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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미국 없는 한국엔 북한도 중국도 관심 없다

입력 | 2021-05-31 03:00:00

모처럼 성과 韓美회담이 깨운 현실
미국 안 통하면 北 다가갈 수 없고
미국 멀어지면 中 일개 변방국 전락
文, 관심 없는 김정은 求愛 그쯤 하길




박제균 논설주간

잘한 건 잘했다고 하자. 한미 정상회담 말이다. 문재인 정권 들어서 드물게, 아니 거의 유일하게 잘한 일 아닌가 싶다. 공동성명 내용 가운데 중국이 반발하는 ‘대만해협·남중국해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개국 협의체) 중요성 인식’ 등은 레토릭(수사·修辭)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미 미사일 지침의 해제로 ‘미사일 주권’을 확보한 건 현찰이다.

이제 우리도 북한처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이 ‘미사일 족쇄’를 완전히 풀어준 건 다분히 패권경쟁 중인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성과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외교는 타국의 ‘니즈’를 지렛대 삼아 자국의 국익을 확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거둔 외교 성과를 보면서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자이툰 부대 방문이 떠올랐다. 취임 이후 찬반 여론을 몰고 다닌 노 대통령에게 여와 야,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찬사를 쏟아낸 사실상 첫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편 가르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을 밀어붙이며 진영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달라진 면모를 보인 문 대통령은 어떨까. 남은 11개월여 임기 동안만이라도 새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별다른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전(前)과 동(同)’이다.

한미 기동 연합훈련에 손사래를 치고, 경제를 망친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설계자를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앉혔으며, 정치적 중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에 전관특혜 얼룩까지 묻은 사람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려 한다. 안보를 경시하고, 내 편은 끝까지 챙기며, 검찰 장악으로 ‘퇴임 후 안전’을 꾀하는 문재인 스타일 그대로다.

변수가 있다면 차기 대통령 선거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 대통령으로선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라도 변신할 자세가 돼 있는 듯하다. 대선이 9개월여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표현한 대로 ‘작은 나라(한국)’가 ‘높은 산봉우리(중국)’를 전에 없이 자극하는 한미 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중국 앞에만 가면 눈부터 내리까는 대통령이 키운 반중(反中) 정서가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청와대도 모를 리 없다.

그래도 이번 회담을 통해 문 대통령이 이것만은 깨닫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해본다. 미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북한에 다가갈 수 없고, 미국과 멀어지면 중국의 변방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 국민적 자존심이 상하지만, 아직은 그게 국제정치에서 우리의 좌표다. 간단없는 자강 노력을 통해 미국 없이 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지, 서둘러 전시작전통제권만 가져온다고 자주 국방이 가능한 게 아니다.

공산 혁명을 거치고도 뼛속까지 중화(中華)사상에 젖어 있는 중국.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주변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는 나라다. 이런 성향은 최강 패권국이 되겠다는 중국몽(中國夢)을 장기 집권 이데올로기로 삼은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이후 훨씬 강해졌다.

그런 중국에 맞서 자존(自存)을 유지하려면 일본처럼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이 있든지, 베트남처럼 건드리면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한국은 이도 저도 아니다. 그나마 중국이 이만큼이라도 인정하는 건 경제력 말고도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이란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북한에 미국은 국가와 정권의 존망(存亡)이 걸린 나라다. 김일성 3대가 반미(反美)를 독재정권의 생존 이데올로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그런 이데올로기를 물려받은 김정은에게 아무리 문 대통령이 구애(求愛)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김정은은 노무현 정권 말 정상회담을 했다가 부도수표를 맞은 아버지의 아픈 기억까지 물려받았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 임기 말 정상회담에 끌릴 수 없는 이유다.

북한은 오로지 미국이다. 미국 없는 한국은 김정은 정권의 별 관심 대상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현금을 갖다 바치지 않는 한. 하지만 그것도 미국 주도 세계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임기 내내 북한에 올인(다걸기)한 문 대통령의 집착은 안쓰럽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때도 됐다. 그러니 이제 그쯤 했으면 한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