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실권이 없고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이 실세였다는 점이 미국 정부 문건을 통해 다시 확인됐다.
2일 외교부가 미국 정부로부터 제공받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비밀해제 외교문서 14건 중에 주한 미국대사관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직후 자국 정부에 보낸 ‘서울에서 일어난 탄압(Crackdown in Seoul)’이라는 제목의 전문이 포함됐다. 이 문건에서 미 대사관은 당시 군부가 이미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전 전 대통령이 군부의 선두에 있다며 “군부 내에서 결정적이지 않더라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반면 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대통령(helpless president)’이라고 평가했다. 최광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 비상계엄 확대 결정이 최 전 대통령 의지와 관계없다는 점을 시사했다고 미 대사관은 보고했다.
또 미 대사관은 비상계엄 확대 결정에 대해 “전두환의 독자적 결정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군부 실권자들의 집단적인 결정이라고 판단한다”고 평가했다. 해당 문건은 1990년대 중반 기밀문서에서 해제됐지만 전, 최 전 대통령 관련 세부 내용은 당시 비공개 처리됐다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지미 카터 당시 미 행정부가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를 경계하는 모습도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1980년 3월 3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군부에 대한 미국 측의 입장’에 따르면 당시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은 그해 6월로 계획된 연례안보협의회의(SCM) 개최 여부에 대한 미국의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군 내부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고 (이런 상황이) 안정되지 않는 한 SCM 개최를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군의 실권자인 전두환에게 직접 전달해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미 국무부는 그해 3월 5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 전 전 대통령의 면담이 이뤄진 대해 “전두환이 이번 만남을 올리브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그의 높아진 위상을 수용하고 당신(글라이스틴 대사)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사관이 전 전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것이다.
1980년 7월과 8월 미 대사관이 작성한 문건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조치도 포함됐다. 당시 대사관은 “수감자들에 대한 가족 접견이 제한되고 있다”며 “박동진 (당시) 외무부 장관은 ‘(변호사를 구하지 못한) 김대중을 위해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변호사들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보고했다. 또 국제앰네스티와 국제법률가연맹 등 국제인권단체가 내란음모 사건 재판에 대한 참관인 신청을 했지만 한국 정부가 “재판을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참관을 반대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들은 5·18민주화운동 전후 국내 정치적 상황에 대한 미 대사관의 평가를 보여준다. 다만 5·18민주화운동 때 발포 명령과 진압 작전을 지시한 경위 등 군사 관련 사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