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산악사진가 김근원의 아들 21년만에 사진집 ‘산의 기억’ 펴내 “아버지의 흑백사진 보다 보면 한국 산에 드러눕고 싶어진다”
고 김근원 산악사진가가 1958년 10월 찍은 설악산 십이선녀탕. 그의 아들 김상훈 씨는 “부푼 찐빵처럼 생긴 암반에서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걷는 산악인의 걸음걸이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열화당 제공
지난달 20일 고(故) 김근원(1922∼2000)의 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이 출간됐다. 김근원은 1950∼1980년대 한국 산의 모습을 찍은 1세대 산악사진가다. 책엔 김근원이 필름으로 찍었고 디지털로 복원된 흑백 사진 수백 장이 담겨 있다. 김근원의 아들 김상훈 씨(68)가 아버지와 연이 있는 산악인들과 대화한 뒤 아버지의 시각에서 사진을 찍은 상황에 대해 쓴 글도 담겨 있다. 78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목소리를 21년 만에 아들이 되살린 셈이다.
김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버지의 사진집을 뒤늦게라도 펴낸 건 한국 산의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 씨의 말대로 김근원이 찍은 사진엔 사람의 손이 별로 닿지 않은 시기 한국 산 본연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58년 설악산 십이선녀탕을 찍은 사진엔 인공구조물이 전혀 없다. 둥글고 미끄러운 계곡을 산악인들이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이 아찔하다. 김 씨는 “해외 유명 산들과 달리 한국의 산은 세월이 만든 살결이 살아 있다”며 “아버지의 사진을 보다 보면 한국 산에 드러눕고, 만지고 싶어진다”고 했다.
김 씨는 “아버지의 사진을 되살린 건 내가 아버지의 영원한 조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씨는 어린 시절 산에 빠져 집안 형편을 신경 쓰지 않았던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론 산에 푹 빠진 아버지를 동경해 같은 사진가의 길을 걸었다는 것. 그는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경쟁하듯 각자 사진을 공부했다”며 “아버지를 자주 따라다니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했다. 김 씨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을까 생각하고, 아버지의 생각을 대필한 과정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왜 그리 산을 사랑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