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격해진 총성 없는 정보전쟁 文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별’ 추가
길진균 정치부장
최 영사는 당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북한의 위조지폐인 일명 ‘슈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을 인도받은 한국 정부의 부검 결과 최 영사의 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독약 성분이 검출됐다. 북한 공작기관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 영사는 ‘이름 없는 별’로 남았다. 국정원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면 검은색 돌판 위에 별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조형물과 마주한다. 돌판 아래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란 글이 적혀 있다. 임무 수행 중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는 물론이고 이름도 공개되지 않는다. 숨진 시기나 과정이 알려지면 비밀리에 수행한 임무가 상대국이나 적에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로 외교관 신분을 갖는 ‘화이트’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던 최 영사의 순직은 이후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이름 없는 별’ 중 유일하게 그 내용이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내부에선 “우리는 사이버에서 일하고 우주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회자되고 있다. 1961년 6월 10일 김종필(JP)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을 때 만들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원훈을 각색한 것이지만 과거와 달라진 국정원의 역할을 보여주는 비공식 원훈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국정원은 산업기밀 유출 방지, 사이버 공격 대응, 국제범죄, 우주정보 등 과거와는 달라진 형태로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상당수 전장이 사이버 세계로 이동했지만 그렇다고 비밀 요원의 활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대북 첩보 수집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산업스파이, 테러 및 납치 대응 등 국내와 해외 곳곳에서 치러지는 소리 없는 전투는 더욱 격해지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름 없는 별’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새겨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방문 때 6·25전쟁 참전용사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 곁에서 무릎을 굽혔고, 이는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 됐다. 다만 우리 곁에도 국익을 위한 헌신이라는 명예만 갖고 이름 없이 사라진 영웅이 적지 않다는 것도 되새겼으면 한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