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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사법개혁? 美 뒤흔들 ‘대법원 쟁탈전’시작됐다

입력 | 2021-06-05 10:15:00

[잇츠미쿡] 종신직 대법관 임명 두고 정치 갈등 재현




● 바이든, 연방대법원 개혁 위원회 설립
● 보수화된 대법원 지형 전환이 목표?
● 美대법관은 종신직…트럼프 정부 거치며 보수 우위 강화
● 민주당 대법관 증원 법안 발의로 공론화
●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실패한 대법원 길들이기
● 당내 반대 세력·유권자 설득이 주요 과제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연방대법원 전경. 연방대법원은 한국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이다. 연방대법원 로고(아래). [GettyImage, 위키피디아 제공]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권의 싸움이 시작됐다. 최종심을 담당하는 대법원과 위헌법률심사 권한을 가진 헌법재판소가 분리돼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연방대법원은 그야말로 미국 최고 사법기관이다.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진보 성향이 다수냐, 보수 성향이 다수냐는 동성결혼·낙태·총기·마리화나 등 정치적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쟁점에 대한 법적 다툼의 최종 결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6인, 진보 성향 대법관 3인 체제다. 민주당은 법을 개정해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을 뒤바꾸고자 한다. 4월 9일(현지 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연방대법원 개혁 방안을 연구하는 위원회 설립을 지시하는 행정명령(executive order)에 서명하면서 진보 진영의 대법원 장악 전쟁이 본격 시작됐다.

행정명령은 의회를 통해 법을 제정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정식으로 법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 여러 제약이 있지만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다양한 행정명령을 내렸다. 가령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당일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정부 기관 건물 내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연방정부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가 소속 직원들에게 임금을 시간당 최소 15달러 이상 지급하도록 한 것도 행정명령을 통해서였다.

오바마 정부 출신 인사가 주도하는 개혁위원회

4월 9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를 설립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AP 뉴시스]


4월 9일(현지 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 설립을 지시한 데 대해 백악관은 “진보·보수 진영의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위원장 자리에는 과거 버락 오바마 정부 인사를 배치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였으며 백악관 법률고문 출신의 밥 바우어 뉴욕대 로스쿨 교수, 오바마 정부 때 법무부 법률자문국에서 부차관보로 일했던 크리스티나 로드리게즈 예일대 로스쿨 교수가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구체적인 행정명령 내용을 살펴보면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는 공동위원장 2명을 포함해 총 36명으로 이뤄진다. 설립 목적은 연방대법원 개혁을 놓고 벌어지는 찬반 논쟁의 주요 논점을 분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연방대법원의 역할과 대법관 종신제 폐지 등을 검토한다. 활동 기간은 180일로 공개회의를 처음 연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한다.

핵심은 대법관 4명 추가하기
바이든 대통령이 만든 이 위원회의 공식적인 임무는 연방대법원 개혁 방안을 검토하고 연구하는 것이지만, 민주당은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정원 늘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원회가 출범하자마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상·하원에서 각각 대법관 수를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다.

대법관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사망하거나 건강상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야 자리가 빈다. 지난해 9월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해 공석이 생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보수 성향의 에이미 배럿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다. 민주당은 11월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하는 차기 대통령이 새로운 대법관을 지명해야 한다고 맞섰지만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이 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주도했다. 지난해 10월 27일 배럿 대법관이 인준을 마치고 취임하며 대법관 구성 비율은 보수와 진보 성향 각각 5대 4 비율에서 6대 3 비율로 바뀌었다.

바로 그때부터 민주당 내 강경 진보 그룹을 중심으로 대법관 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백악관을 차지하고 상·하원 모두 다수당이 되는,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되고 민주당이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데 이어 1월 5일(현지 시간) 치러진 조지아주 상원의원 결선투표에서 민주당이 두 석을 가져오며 상원에서도 다수당 지위를 확보했다.

상원의원 비율은 민주당 50석(민주당 성향 무소속 2석 포함), 공화당 50석으로 동률이지만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상원의장 자격으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 민주당이 상원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바이든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켰고, 민주당 의원들은 대법관 수를 늘리는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발의된 법안이 법률로 확정된다.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을 차지하는 정당은 법 개정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15년 8월 5일 한국 대법원을 찾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 2020년 9월 진보 성향인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사망해 대법관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보수 성향의 에이미 배럿 연방법원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다. [뉴스1]


연방대법원에 자기편에 우호적인 대법관을 채워 넣고자 하는 역사는 반복돼 왔다. 예컨대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하던 2016년 2월 보수 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해 공석이 생겼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해 3월 진보 성향의 메릭 갈랜드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신임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고 연방상원에 후보 인준을 요청했다. 하지만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의 반대로 갈랜드 후보는 인준을 받지 못했다(그는 결국 바이든 정부 초대 법무장관이 됐다).

2016년 공화당은 그해 11월 대통령선거가 있으니 차기 대통령이 새 대법관 후보를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시감이 드는 대목이다. 지난해 9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차기 대법관으로 보수 성향 후보를 지명했다. 민주당은 “선거가 코앞이니 차기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를 지명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지난해 공화당은 “역대 사례로 볼 때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상원 다수당일 경우 대선을 앞두고 대법관 공석이 생겨도 현직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가 인준을 받았다“는 논리를 폈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진보 성향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을 때는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상원 다수당은 공화당이었다. 2016년과 2020년은 상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했지만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의 인준을 막을 수는 없었다.

4選 루스벨트도 실패한 대법관 증원
입법을 통해 대법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대법관 공석을 채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과거 이런 시도는 사회적으로 거센 반발을 불렀다. 1937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사법절차개혁법안(Judicial Prodedures Reform Bill of 1937)의 경우다.

연방사법센터(FJC) 웹사이트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추진하던 뉴딜 법안의 상당 부분이 연방대법원에서 기각되자 대법관 정원을 최다 6명 늘리는 법안 제정을 추진했다. 대법관이 만 70세 6개월이 지나도 은퇴하지 않으면 추가로 대법관을 지명하는 제도다. 하지만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 흐지부지됐다. 다만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제 법안 통과를 예상했다기보다 연방대법원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꺼내 든 카드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번에 민주당이 발의한 연방대법원 조직개편 법안도 통과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4월 26일(현지 시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민주당의 세 상원의원은 대법관 수를 늘리는 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콜로라도주 마이클 베넷, 애리조나주 마크 켈리, 네바다주 캐서린 코르테즈 매스토 의원이다. 이들은 당장 내년에 상원의원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연방대법원 이슈가 선거 쟁점이 되는 걸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후보를 상대하는 데 불리한 이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잠시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절차를 살펴보자. 임기 6년의 미국 상원의원은 총 100명이다. 2년마다 정원의 3분의 1을 새로 뽑는 선거를 치른다. A그룹이 2020년 11월에 선거를 치렀다면, B그룹은 2022년 11월, C그룹은 2024년 11월에 선거를 치르는 식이다. 법안에 반대하는 세 명의 의원은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있다. 당 지도부에서도 이들 의견을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다. 4월 15일(현지 시간)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법안을 표결에 부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사실 바이든 대통령도 대법관 정원 늘리기에 적극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민주당에서 온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당시 대법관 정원 늘리기에 부정적 의견(“not a fan of court packing”)을 표명한 바 있다. 이번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 설립도 민주당 진보 그룹의 압박에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폴리티코’는 위원회에서 대법관 정원 늘리기에 찬성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을 내놨다.

대법관 정원 증대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 내 강경 진보파는 바이든 대통령이 만든 연방대법원 개혁위원회에서 보고서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린 뒤 본격적인 입법 전쟁에 돌입할 전망이다.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당내 반대 의원들을 설득하는 가장 높은 허들이 남았다. 하원에서는 민주당 의원이 공화당 의원보다 6명 많지만 상원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 의석수가 같다. 민주당 상원의원 전원이 법안에 찬성해야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해 가까스로 법을 개정할 수 있다. 민주당 내 강경파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당내 반대 의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미국 사법부의 핵심인 연방대법원에 또다시 정치적 전운이 감돈다.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