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이야기’ <7> 곶자왈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지역 도너리오름은 원형과 말발굽분화구를 동시에 지닌 복합화산체. 화산 분화를 하면서 한경-안덕곶자왈지대 한경면과 대정읍 지역 곶자왈을 생성시켰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이들 지명은 ‘곶자왈’을 잉태한 오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제주의 독특한 숲을 일컫는 곶자왈은 과거 농사지을 수 없는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됐으나, 최근 생태계 보고이자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를 만드는 최대 통로로 확인되면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2012년 세계자연보전총회(WCC)에서 의제로 선정할 만큼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연구 및 조사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중요 환경자산으로 평가받는 곶자왈은 오름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정상에 오르자 동부지역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말발굽형 분화구에서 시작한 숲은 큰지그리오름 옆을 돌아 동쪽으로 교래휴양림 일대까지 넓게 펼쳐졌다. 이 숲은 민오름이 분화할 때 용암이 흘러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곶자왈 지대다. 이 곶자왈 일부는 조천·함덕곶자왈 지대의 교래곶자왈로 불리고 있다. 꿈틀꿈틀 흘러가던 용암이 잠시 멈춘 곳에는 거대한 암괴가 만들어졌고 용암의 기세가 약하거나 닿지 않는 곳은 목장 등으로 이용된다.
○ 젊은 연대 오름이 곶자왈을 잉태
이런 곶자왈 분포 지역은 조천·함덕을 비롯해 애월, 한경·안덕, 구좌·성산 등 크게 4개 지대로 구분한다. 조천·함덕곶자왈을 만든 오름은 민오름과 거문오름이다. 한경·안덕곶자왈은 도너리오름과 병악에서 흘러내렸으며 애월곶자왈 기점은 노꼬메오름이다. 4개 곶자왈 지대 면적은 92.56km²로 추정되는데 제주도 전체 면적 1850km²의 5%가량을 차지한다.
구좌·성산곶자왈은 그동안 동거문, 다랑쉬, 용눈이, 백약이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동거문, 둔지봉이 기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안웅산 박사는 “음영기복도, 경사와 암석에 대한 분석 등으로 조사한 결과 구좌·성산곶자왈을 형성한 용암류는 여러 오름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연구와 달리 대부분 동거문오름에서 나왔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곶자왈 북동부 일부분은 둔지봉에서 분출했다”고 밝혔다.
이들 곶자왈을 탄생시킨 오름은 한라산국립공원 아래 지역인 해발 200∼600m의 중산간에 대부분 집중됐다. 곶자왈 용암류 밑에 위치한 고토양을 채취해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을 한 결과 선흘곶자왈 1만1000년, 구좌·성산곶자왈 지대 9400년, 한경·안덕곶자왈 지대의 안덕곶자왈 5000년 등으로 분석됐다. 안 박사는 “곶자왈을 형성한 용암류는 대부분 1만 년 이내 젊은 연대로 볼 수 있다”며 “암석이 부서져 흙이 되기까지에는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교적 젊은 연대에 속한 용암류이기 때문에 토양층이 빈약하고 용암이 흐른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남북보다는 동서 방향으로 용암이 진행한 지대에 곶자왈이 형성된 것도 특징 중 하나다. 꿀을 쏟으면 찐득찐득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점성이 높은 ‘아아용암’이 곶자왈 용암을 형성한다고 봤으나 최근 들어 점성이 낮은 ‘파호이호이용암’, 파호이호이에서 아아용암으로 전이 등 다양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오름의 위치와 고도에 따라 식생 달라
흙을 찾아보기 힘든 암괴지대에도 씨앗이 날아들어 울창한 숲을 형성했고 독특한 곶자왈이 탄생했다. 곶자왈 숲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지질구조나 해발고도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졌다. 해발 200m 저지대에서는 개가시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400m 이상 높아지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주인 역할을 한다. 선흘곶자왈, 한경곶자왈처럼 겨울철 눈이 쌓여도 푸른빛이 도는 상록수 숲이 있는가 하면, 가을철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드는 교래곶자왈이 있는 등 저마다 특징을 뽐낸다. 파호이호이용암이 우세한 곶자왈은 용암 도랑이나 함몰지가 많은 곳과 달리 습지식생이 발달하기도 했다.
곶자왈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환박물, 남사록 등 고문서에서 숲을 뜻하는 ‘수(藪)’로 표기됐다. 충암 김정(1486∼1521)은 제주풍토록에서 ‘이 땅에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나 오직 이 나무숲만이 진실로 기이한 경승이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이 수를 ‘꽃(花)’, ‘고지(高之)’로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곶자왈의 ‘곶’을 의미한다.
곶은 숲, 자왈은 덤불로 각기 따로 쓰인 말인데 언제부터 곶자왈이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95년 발간한 제주어사전은 곶자왈을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적고 있다. 2014년 제정된 곶자왈 보전 및 관리 조례에서 ‘제주도 화산활동 중 분출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괴지대로 숲과 덤불 등 다양한 식생을 이루는 곳’이라고 정의하면서 지질의 중요성을 포함시켰다.
정광중 제주대 교수는 “곶자왈은 오랫동안 제주도민에게 자연자원을 공급하는 생명선이었고 생태, 유산, 관광, 환경 교육 등에서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곶자왈, 오름에 대한 가치를 규명하고 높이기 위해 보다 폭넓은 조사 및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곶자왈은 생물종 다양성 지키는 보물창고”
개가시나무 등 자생식물 770종류
제주도 식물의 38%에 해당
곶자왈은 생물종 다양성을 지키는 보물창고다.
한경·안덕곶자왈에 410여 종, 애월곶자왈 450여 종, 조천·함덕곶자왈 510여 종, 구좌·성산곶자왈 32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개가시나무, 대흥란, 백서향, 으름난초, 솔잎란, 가시딸기 등 특산 및 희귀종이 서식하고 있다.
곶자왈 식물의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은 연간 16만6200t이다. 이는 중형 자동차 4만1550대가 연간 뿜어내는 양이다. 그만큼 환경 기여도가 높다.
곶자왈은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만주, 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한들고사리를 비롯해 좀나도히초미, 좀고사리, 골고사리, 큰톱지네고사리 등 북방계 식물이 터를 잡고 있다. 땅속 깊숙한 곳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곶자왈의 용암 함몰지, 풍혈지 등은 여름철에도 15도 안팎의 온도를 유지해 북방계 식물이 생존할 수 있다.
김대신 제주도세계유산본부 생물자원연구과장은 “곶자왈에 자생하는 관속 식물은 770종류로 파악되고 있는데 제주도 식물 1990종류의 38%에 해당한다”며 “곶자왈이 제주도 전체 면적의 5%에 불과한 점을 고려한다면 좁은 땅에 상당히 다양한 식물 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