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 동아일보DB
윤 전 총장은 원래 ‘싸움’으로 단련되고 성장한 검사였다. 거악(巨惡)을 가장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택한 ‘선한 싸움’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지휘하다 상부의 방해로 수사가 막히자 국정감사장에서 검찰 지휘부의 외압 사실을 폭로해 좌천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자신을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발탁해 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2019년 ‘조국 사태’가 터지자 주저 없이 수사를 밀어붙였다.
옳은 일이라면 직을 걸고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윤 전 총장의 거침없는 인생관은 당시에는 그에게 적지 않은 고통과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의 실현에 목말라 있던 국민들에게는 윤 전 총장의 이런 결단력과 배포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지난해 직무배제와 징계 사태를 거치며 부당한 정치적 압박에 맞선 것이 보수야권의 대표 대선 주자로 올라서는 자양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 전 총장이 중도 사퇴 직후 잠행에 들어간 것은 총장직 수행 과정에서 여권으로부터 가해진 사퇴 압박 등으로 인한 피로감이 컸던 탓에 우선 자기충전을 위한 시간을 가지면서 대선 정국 구상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유력 대선 주자이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윤 전 총장으로서는 공식적인 정계 진출 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면적으로 대선에 뛰어드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관측된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대선 등판을 앞두고 과거와 달리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전 총장은 공식적인 정치 참여 선언이나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야권의 대권 주자가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잠행을 장기화할 경우 지지자를 포함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서 윤 전 총장에 대해 가지는 불확실성을 키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베일에 가려진 윤 전 총장의 ‘신중 모드’를 수정할 것을 촉구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7일 페이스북에 “부조리 앞에 정치공학의 침묵으로 일관하지 말라. 당당했던 총장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밝힌 데 이어 8일에도 라디오에서 “윤 전 총장이 아직 수면 아래에 있어 행보가 불투명한 면이 있다. 빨리 수면 밖으로 나와 정치력을 검증받고 국민에게 비전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