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준 정치부 차장
2018년 2월 9일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에게 잊지 못할 하루였다. 환하게 타오르는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화를 문 대통령 내외와 마이크 펜스 당시 미국 부통령,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함께 지켜봤다. 문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표정으로 한반도기를 들고 나란히 입장하는 남북 선수단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불과 3시간 전, 문 대통령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9일 오후 5시 20분, 강원 평창 용평리조트에 마련된 회담장을 채웠던 양국 취재진이 철수하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는 재킷 주머니에서 준비해 온 A4 용지를 꺼냈다. 회담장에 배석했던 정부 관계자의 전언.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준비해온 문구만 계속 읽었다.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 소녀상 문제 등 민감한 내용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들이었다. 듣고 있던 문 대통령의 표정도 굳어갔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일본 총리의 방한 무대는 그렇게 냉기류만 흘렀다. 공식 브리핑에도 그 싸늘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합의는 국가 대 국가의 합의로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야 한다는 게 국제 원칙”이라고 했고, 문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정부 간 주고받기식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가 “북핵 해결을 위한 6자 안보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처럼 문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는 일본의 협조도 필요하다. 우리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인 한미 동맹 역시 한일 관계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말처럼 “한국은 린치핀, 일본은 코너스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셔틀외교’의 닻을 올렸던 것도 한일 관계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셔틀외교는 단 한 번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문 대통령 임기 내 양국 간 냉기류를 풀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문 대통령이 참석하는 G7 회의에서 양국의 미래 지향적 관계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문 대통령 임기 동안 셔틀이 이륙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정권에서라도 셔틀외교가 재개될 수 있는 기반은 만들 필요가 있다.
한상준 정치부 차장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