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6일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를 방문한 김정은이 만화영화 캐릭터가 뜬 모니터 앞에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2014년 11월 26일 김정은이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를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이날 김정은은 “야심을 가지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만화영화(애니메이션) 대국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이 “만화영화 창작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오기 위한 강령적 지침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내막을 잘 아는 대북소식통은 “김정은이 만화영화 수준을 질책하면서 샘플 하나 보내줄 거니 그걸 따라 배우라고 했다”고 전했다.
다음 날 김정은이 보낸 CD가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한국 역사물 애니메이션이었고, 제작자들은 황송한 태도로 시사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런 김정은이 지난해 말 ‘반동문화사상배격법’이란 것을 만들어 한류를 접하면 최대 사형에 이르는 엄벌을 내리고 있다. 북한에서 반동문화를 가장 많이 접한 사람이 다름 아닌 김정은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다.
김정은의 독촉 아래 만화영화 제작자들은 80일 전투니, 100일 전투니 하면서 뽕이 빠지게 만화영화를 찍어냈다. 새 애니메이션은 3차원(3D)을 도입하는 등 나름대로 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용과 방식은 기존의 고리타분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라도 만화영화는 만들지만 영화는 사정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은 1990년대에도 영화는 1년에 10여 편씩 제작됐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거의 나오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소식통은 “혁명 과업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욕먹으니 매년 몇 개씩 찍기는 하는데 김정은이 비준(승인)을 해주지 않아 창작 의욕을 잃은 상태”라고 전했다. 문화예술을 사상적 세뇌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하는 북한에선 김씨 일가의 허락이 없으면 새 영화가 공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 영화계는 속도전으로 바꿀 수가 없다. 영화를 찍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 상업 영화가 없으니 당국이 돈을 대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논다고 욕을 먹을 수는 없으니 제작자들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부잣집 자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스타로 만들어주는 대신 각종 소품과 의상, 세트장 제작 비용, 스태프들 식사까지 대는 조건이다.
이런 환경이니 닭다리 뜯어먹는 장면이 하나라도 들어가면 모두가 긴장한다. 감독이 “다시” 하면 주인공 얼굴부터 험악하게 변한다고 한다. 장마당에 가서 자기 돈으로 닭을 다시 사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영화에서 연기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 뻔하다. 게다가 잘못하면 황색 바람이 들었다고 몰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니 김정은도 짜증나서 못 봐줄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 만들면 사인이 떨어지지 않으니 영화 창작자들은 요즘 옛날 영화를 각색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워낙 권력자들이 많이 처형되다 보니 이들이 끼고돌던 연예인들도 많이 연루돼 죽었다. 배우가 숙청되면 영화는 상영 금지 목록에 오른다. 이런 영화에서 숙청된 배우를 다른 배우로 대체해 다시 제작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부족인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다 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박미향이나 장성택의 여자로 처형된 김혜경이 나온 영화는 배우도 바꾸지 않고 작년부터 다시 상영된다. 배역 이름이 나오는 엔딩에서 주인공 이름만 삭제됐다. 그렇긴 해도 숙청된 배우의 얼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북한 영화판이 비정상이란 의미인데, 정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해가 갈수록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다. ‘혁명’이란 것을 시작할 때 예술선전부터 앞세웠는데 망해갈 땐 예술선전이 맨 먼저 죽는 처지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