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누구보다 혹독한 전쟁에 상처를 입은 우리나라의 유해발굴단은 고고학과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세계적으로 앞서가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간 전사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전통은 먼저 간 우리 가족과 그 은인을 추모하는 인간의 본성이자 미래에 대한 다짐이다.
전사의 상징인 낡은 칼
알타이 초원의 사슴돌은 낡은 칼과 함께 초원의 전사를 추모하는 비석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된 아키나케스는 전사를 추모하는 칼로 약 28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인욱 교수 제공
전사의 유골은 당시 주요한 전리품이 되기도 했다. 정복해야 할 도시나 마을이 없는 유목민들은 적의 무덤을 찾아 인골을 훼손해야 비로소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무덤 속 귀금속은 전리품으로 챙기기도 했다. 실제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면 이미 도굴이 되어서 인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고구려 vs 당나라 ‘유골 전쟁’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뒤 곳곳에 적의 시신을 모아서 일종의 전승기념탑인 ‘경관’을 세워 사기를 고취했다. 고구려의 전쟁 피해도 컸을 터이니, 이 경관은 고구려 전사를 추모하고 중국 세력을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영류왕 14년(631년)에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던 수나라 군사 유골을 찾아와 매장해 주었다. 당나라가 수나라의 전쟁을 굳이 챙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아서 당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는 당이 수나라의 복수를 표방하고 결전을 예고한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책에도 전쟁에 희생된 병사들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가족들의 생계 보조를 명령했던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정성은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고려 현종은 “길가에 방치된 국경수비군 유골은 집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현종 5년·1014년)고 했다. 육진사군을 개척해 북방으로 나아간 세종 때에도 “국경에 나가 전사하거나 병사하면 모두 시체를 찾아서 메고 돌아와 장사하라”(세종 21년·1439년)는 엄명이 있었다. 엄청난 군비가 들어가는 북방 정벌에도 자신의 군사를 사랑하고 지키는 마음은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영웅의 흔적 찾는 유해발굴단
국립현충원 유해발굴단이 발굴해 신원이 확인된 국군의 유해 위에 태극기가 덮여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우리는 20세기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쟁 피해를 입었다. 유해 발굴 전통이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는 미국이다. 한국은 비록 역사는 짧지만 빠르게 정착되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유럽과 수많은 희생을 겪은 러시아 같은 나라들도 유해 발굴에는 소홀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전후 상처를 딛고 세계의 선두에 선 한국은 전사자를 기념하는 길에서도 앞서나가는 셈이다.
우리의 유해를 찾는 것은 물론 우리와 겨루었던 적의 유해도 인도적 차원에서 찾아 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고려 우왕은 우리 백성은 물론 적이었던 왜구들의 시신도 거두어 줄 것을 명했다. 적이라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은 존중해야 한다. 문명화된 21세기 사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표방하며 무기를 과시하는 대신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영웅들을 기리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어느덧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 역사에서 전쟁이 없는 시절은 없었다. 그들을 잊고 전쟁도 잊는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뼈 한 조각에 정성을 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