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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철거현장도 감리자는 없었다

입력 | 2021-06-11 03:00:00

[셀프감리 ‘잠원동 붕괴’ 그후 2년, 감리제도 개선 유명무실]
바뀐 법따라 구청이 감리 정했지만 ‘비상주 감리’ 내세워 현장 안나와
건물 받쳐주는 구조물도 부실 시공… 文대통령 “철저 조사, 엄중 처리를”




건물 해체계획서와 달리 5층 건물은 맨 위층부터 철거되지 않고 ‘나무 밑동을 베듯’ 아래층부터 제거됐다. 철거 상황을 점검해야 할 감리자는 붕괴 현장에 없었다. 철거 공사업체는 재하청을 줘 위법 시비에 휘말렸다.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참사는 말 그대로 ‘안전불감증의 종합판’이었다. 20대 예비신부를 숨지게 한 2019년 7월 4일 ‘잠원동 붕괴 사고’ 이후 관련 법이 재정비됐지만 ‘잠원동 교훈’은 없었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 동구 학동의 5층 건물에 대한 해체 허가 신청은 지난달 14일 구청에 접수됐다. 구청은 건축사 대표 A 씨를 감리자로 지정했다. 철거업체가 감리자를 ‘셀프 지정’한 잠원동 붕괴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지난해 5월부터 구청이 감리를 지정하도록 법이 바뀐 것이다. 해체계획서에는 잭서포트(철제 지지대)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지 않았다. 잭서포트 미설치는 2년 전 잠원동 붕괴 사고가 벌어졌을 때도 붕괴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A 씨는 건물의 구조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며 ‘적정’ 결론을 내렸고, ‘비상주 감리’라는 이유로 사고 당일 현장에도 나오지 않았다.

해체 공사업체 H사는 B사에 원칙적으로는 법으로 금지된 재하청을 줬다. 현장소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굴착기 기사 등 2명에게 재하청을 준 것이 맞다”고 했다. H사의 재하청을 받은 굴착기 기사는 5층부터 3층까지 순서대로 철거한다는 계획과 달리 2∼4층을 동굴처럼 깎아낸 것으로 보인다. 구청 관계자는 “해체계획서대로 철거가 되지 않았다고 본다”고 했다. 경찰은 굴착기 기사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해 경위를 조사 중이다. 광주경찰청은 10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합동 현장감식을 진행했다. 건물을 지지하기 위해 채워 넣었어야 할 밥(폐건축물과 흙)이 매우 부족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진단이 나왔다. 경찰은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 광주현장사무소와 철거 공사를 담당했던 업체 2곳 등 총 5곳을 압수수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사고 직후인 9일과 10일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과 이용섭 광주시장으로부터 각각 유선 보고를 받고 “신속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엄중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해체계획서 무시하고 철거… 위층 아닌 아래층부터 파내다 붕괴

[광주 건물 붕괴 참사]

광주 건물 붕괴 ‘안전불감증 종합판’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에서 건물 붕괴 전 촬영된 철거 현장. 건물 옆에 쌓아올린 3층 높이 흙더미 위에 굴착기가 올라가 벽을 허물고 있다. 위태롭게 외벽만 남은 채 내부 바닥 등 상당 부분이 절단된 건물을 가느다란 파이프로 연결된 비계가 둘러싸고 있다. 왼쪽에선 살수차가 먼지를 없애기 위해 물을 뿌리고 있다. 독자제공

‘이 건물의 경우 최상층에 옥탑 구조물이 있어 그 부분부터 선철거를 진행한 후 철거 공사를 진행한다.’

‘성토체(盛土體)를 5층 높이까지 올리고, 5층부터 3층까지 외부 벽과 방벽, 바닥 순서로 해체→지상으로 중장비 이동 후 성토체 제거→1, 2층 해체.’

광주 동구청에 제출된 A4용지 149쪽 분량의 학동 5층 건물 철거에 대한 해체계획서 내용 중 일부다. 하지만 붕괴 직전 사진과 동영상에는 굴착기 기사가 해체계획서와는 딴판으로 2∼4층 아래를 동굴처럼 파내는 듯한 모습이 찍혔다.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10일 합동 현장감식을 진행한 뒤 정확한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한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다.

○ 계획서와 다른 철거 작업… “비용 줄이려 한 듯”

해체계획서에 따르면 당초 계획은 성토 작업을 해 굴착기를 5층까지 닿을 수 있는 높이로 이동시킨 뒤 5층부터 순차적으로 3층까지 해체를 완료하고, 이후 지상으로 장비를 이동시켜 1, 2층을 해체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고 당일 촬영된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살펴보면 성토체 위로 올라간 굴착기는 건물 3∼5층의 측면 외벽을 한꺼번에 해체해 건물이 ‘ㄷ’자나 동굴 모양이 된 모습 등이 담겼다. 구청 관계자는 “맨 위층의 외벽부터 시작해 안쪽 벽, 슬래브 순으로 철거 순서가 정해져 있다”며 “작업 순서와는 달리 건물 밑부터 철거를 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사고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하고 굴착기 작업자 B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과실이 중대하다고 판단되고 혐의를 인정해 입건했다”고 설명했다.

건설업계 전문가들은 최대한 빠르게 철거를 끝내고, 철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 같은 공사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송규 안전전문기술사는 “도로 쪽에서 철거 공사를 했다면 건물이 균형을 잃더라도 철거가 마무리된 재개발구역 쪽으로 무너지며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 경우 도로 차선 3∼4개를 점거하고 임시 보행도로도 만들어야 하는 탓에 철거비용과 철거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형준 건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철거공사는 최저낙찰제로 입찰이 이뤄지고 큰 사고만 발생하지 않으면 건물 지을 때처럼 ‘잘 지었네, 못 지었네’ 하고 평가할 것 자체가 없다”고 전했다.

○ “건물 흔들림 막는 ‘밥’ 제대로 넣지 않아”
9, 10일 철거 현장 인근에서 만난 인부들은 “그 건물에는 ‘밥’을 제대로 넣질 않았다”고 말했다. ‘밥’이란 건물을 철거하기 전 건물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하를 비롯해 1∼3층에 폐건축물이나 흙을 채워 넣는 일을 말하는 현장 용어라고 한다. 한 인부는 “밥을 제대로 채우지 않으면 건물이 빈 상자 같은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의 건물을 굴착기가 때리면 위아래가 흔들리는 모양이 돼 위험해진다”고 전했다.

붕괴 현장의 감식에 참여했던 전문가는 10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사고가 난 건물은 지반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지하 1층이 있는 건물인데, 이곳을 비워 놓고 지상에만 흙을 쌓아 올리면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5층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서는 작업 전에 비어 있는 지하 1층 공간을 흙이나 폐건축물 등을 이용해 메워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구청에 제출된 해당 건물의 해체계획서에는 지하 1층에 대한 사전 작업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철거 현장에서는 구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지대인 ‘잭서포트’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해체계획서에는 이 내용도 없었다. 2년 전 발생했던 잠원동 붕괴 사고에서도 잭서포트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또 불거진 부실 감리 의혹…바뀐 법 무용지물
지난해 5월부터 4층 이상의 건물에 대한 해체 공사를 할 때는 지방자치단체가 감리를 직접 지정하도록 한 개정 건축물관리법이 시행됐다. 2019년 발생한 ‘잠원동 붕괴 사고’ 당시 건축주가 철거업체의 지인을 감리로 고용해 부실한 감리를 한 것이 사고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사 대표 A 씨가 감리자로 지정됐지만 A 씨는 붕괴 사고 당시 현장에 없었다. 구청 관계자는 “A 씨가 사고가 일어난 뒤 사실상 잠적해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철거가 시작됐던 8일에는 현장에 있었는지는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주=권기범 kaki@donga.com·정승호·김수현 기자 /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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