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구례 운조루와 쌍산재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살기 좋은 터로 지목한 전남 구례군의 운조루.(큰 사진) 지리산 자락 끝단에 위치한 운조루는 대문 앞에 마당 대신 조성한 연못(오른쪽)과 물도랑 등 수기(水氣)를 적절히 응용한 대표적 고택이다.
《부자를 배출하는 곳의 조건을 확인해 보기 위해 조선팔도 360여 고을을 샅샅이 살펴본 이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실사구시형 인문지리학자답게 흥미로운 답사 결과를 내놓았다. “물은 재물과 복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 주거지보다는 강가 주거지가 낫고, 강가보다는 시냇가 주거지가 더 좋다”고도 했다. 이중환이 제시한 부자 터는 당시 조선 양반층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책 ‘택리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중환이 시냇가 주거지로 극찬한 곳 중 하나가 지리산 자락 구례 구만(九萬·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대다. 바로 호남 명가로 불리는 운조루(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와 ‘비밀의 정원’으로 유명한 쌍산재(전남 민간정원 5호)가 자리한 곳이다.》
○ 집터에서 나온 금빛 돌거북
조선 영조 때인 1776년 지어진 운조루(토지면 오미리)는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양반가 주택이다. 낙안군수를 지낸 창건주 류이주(1726∼1797)가 집을 지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이 터를 본디 이름난 길지(吉地)라고 하였으나 바위가 험난해 감히 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류이주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둔 곳(천장지비·天藏地秘)이 나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며칠 만에 집터를 닦았다.”(삼수공행장·三水公行狀)
과연 운조루는 부자가 나는 시냇가 집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우선 운조루 대문 앞으로 바짝 붙어서 흐르는 개울물이 눈에 띈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돌 도랑을 따라 개울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운조루의 동쪽 문수저수지 방면에서 흘러온 개울물이 운조루 앞을 지나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이를 ‘동출서류 내당수(東出西流 內堂水)’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경복궁 앞으로 흐르는 청계천쯤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그 바깥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 외당수(外堂水)가 감싸주면 금상첨화다. 운조루에서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2km 남짓한 거리의 섬진강이 그런 물줄기다. 서울의 한강에 해당한다. 이처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서로 교차하는 두 물줄기는 터의 좋은 기운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땅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운조루 주인의 재치 있는 ‘풍수 인테리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문 앞마당에 해당하는 곳에 아예 연못(동서 45m, 남북 15m)을 만들어 놓았다. 네모진 연못 가운데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동그란 섬이 하나 있다. 연못 터 자체가 금환락지(金環落地·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명당이라고도 전해지는데, 실제로 연못 가운데 섬은 대단한 기운이 응집돼 있다. 운조루는 물을 이용한 가택 개운(開運)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운조루에 숨은 5개 ‘보물’ 찾기
운조루의 솟을대문. 처마 양쪽에 액운과 살기를 막아준다는 호랑이 뼈와 말 뼈가 걸려 있다.
세 번째는 바깥사랑채 마당에 심어진 위성류(渭城柳)다.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위성류는 1년에 두 차례 꽃이 피는 희귀한 나무로 운조루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는 얘기가 집안 내력으로 전해져 온다.
네 번째는 위풍당당한 건물채에 비해 현저히 낮게 만든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마루 밑 기단에 낸 굴뚝 구멍은 밥 짓는 연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설계한 것으로 끼니를 거르는 이웃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조치다.
운조루의 큰 사랑채(가운데)와 중간 사랑채인 귀래정(오른쪽). 운조루와 귀래정은 모두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말이다.
○별서정원이 돋보이는 쌍산재
구례에서 운조루와 비교되는 고택이 쌍산재다. 전국 최장수 마을로 꼽히는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이곳은 운조루와는 불과 2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방송사 프로그램인 ‘윤스테이’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쌍산재의 명당 혈에 자리 잡고 있는 우물. 우물 뒤쪽 담장에는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甘露靈泉·천년 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스러운 샘)’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다.
그런데 쌍산재 주인은 사랑채 앞쪽 마당에 있는 우물 명당을 이웃들에게 내주었다. 우물터가 집안에 있지 않고 집 담장 바깥의 주차장에 있다. 쌍산재 주인이 마을 사람들이 물을 불편하지 않게 길어 가도록 담장을 새로 고쳐 우물을 바깥으로 배려한 것이다. 쌍산재의 넉넉한 마음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쌍산재 역시 운조루처럼 안채에다 ‘베풂의 뒤주’를 운영했다. 춘궁기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뒤주에서 쌀과 보리를 꺼내 갔고, 다음 해 다시 채워 넣는 방식으로 함께 고난을 이겨갔다고 한다.
쌍산재의 안채. 안채에는 춘궁기에 이웃들을 배려한 ‘베풂의 뒤주’가 있다.
쌍산재의 아래 공간인 살림집과 위쪽 공간인 정원을 경계 짓는 대나무 숲.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비밀의 정원’이 나타난다.
운조루와 쌍산재는 수백 년에 걸쳐 그 명성을 자랑해온 진정한 명가다.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나 귀족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