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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구원은 없었다’…최태원 회장의 복심 담긴 사회적가치연구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입력 | 2021-06-13 09:00:00

[인터뷰] 나석권 사회적가치연구원장
“최 회장, 사회적 가치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봉사하실 것”
“돈만 벌지 말고 ‘파이낸셜 스토리’ 쓸 수 있어야”
285개 기업에 100억원 인센티브로 나눠 줘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외환 위기라는 국가적 환난(患難)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경제부 장관에 발탁된 이규성 장관의 수행 비서를 1년8개월 간 지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외평채 카드를 움켜쥐고 미국과 협상하려고 동분서주한 이 장관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것은 공직자로선 행운이었다. 강봉균 대통령경제수석,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재벌의 ‘빅딜’을 주도하고 이규성 장관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던 때다.

노무현 정부 때는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의 비서로 청와대에 파견됐다. 서기관급 행정관으로 김 실장을 1년 반 모시면서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이 국정을 어떻게 논하는지를 옆에서 지켜봤다. 그는 스스로를 ‘관방(官房)’이라고 부른다. 일본 행정조직을 일컫는 말이지만 관리 행정과 사무를 총괄 조정하는 역할을 뜻한다.

행정고시 35회로 워싱턴 IMF 파견과 뉴욕 총영사관 재경관을 지내 국제적 안목도 겸비했다. 기획재정부에 계속 있었으면 지금쯤 차관보를 맡았을 관록이다. 그런데 4년 전 어느 날 느닷없이 관직을 박차고 나왔다. 나석권(55) 사회적가치연구원장 얘기다. 잘 나가던 에이스 고위 공무원은 왜 경제 관료의 길을 접었을까. 공직사회를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적 가치(social value),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8일 나 원장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위치한 사회적가치연구원에서 만났다.


●최태원 SK 회장의 역점 사업을 지휘

경제 관료 출신인 나석권 사회적가치연구원장이 8일 서울 이태원 집무실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려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2013년 다보스포럼 참석에 이어 2014년 최 회장이 감옥에서 집필한 책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사회적가치연구원은 SK그룹 계열사들이 매년 내놓는 사회공헌기금으로 운영되는 회사다. 연구원 이름에 SK를 붙이지 않는 것은 그룹과 무관한 업무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최태원 회장이 2013년 다보스포럼에 출장 가서 사회적 기업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기업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요. 돈은 한 순간에 잘 벌 수도 있지만 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사회 문제를 푸는 데도 앞장서야 소비자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회적 가치’라는 개념인데, 이것을 SK의 ‘업(業)’에서 어떻게 이뤄나갈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 원장은 최 회장이 2014년에 직접 쓴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라는 책을 서가에서 꺼내 보여줬다. 당시 구속돼 있던 최 회장이 감옥에서 쓴 책이다. 기업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어떻게 창출하고 지원할지를 고민한, 구체적인 방법론도 녹아 있는 저서다.

“재벌이 감옥에 있으니 마치 기부하듯이 ‘좋은 일 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책이 나오기까지 1~2년이 걸리기 때문에 다보스포럼 이후 최 회장의 고민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습니다. 기업의 재무성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이것이 스토리로 자본시장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보신 거지요. 사회적 가치를 담아 ‘파이낸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입니다.”


●‘기업에 돈 주는 회사’는 처음일 것
나 원장은 2017년 SK경영경제연구소 전무급으로 SK그룹에 입사했다. 그 곳에서 2년 간 일하다가 사회적가치연구원을 만들어 독립했다. 거기엔 최 회장의 ‘복심(腹心)’이 담겨 있었다. 사회적가치연구원 이사장은 최태원 회장이다. 최근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까지 맡아 지금은 자주 들르지 못하지만 연구원에는 최태원 이사장의 방이 별도로 있었다. 나 원장은 “최 회장은 은퇴 후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는 일에 나설 것으로 알고 있다”라면서 “어떻게 하면 사회적 가치를 높일 지를 평생의 업(業)으로 삼고 봉사하실 계획을 갖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 회장은 나 원장에게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기업을 발굴하고 이들이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주는 사업을 총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자리 잡은 사회적가치연구원은 남산 하얏트호텔과 삼성 리움미술관이 지근거리에 있다. 연구원 벽에 걸려 있는 CSES는 창조(Creating)와 조정(Steering) 고취(Empowering) 공유(Sharing)를 의미한다고 나석권 원장은 강조했다. 이훈구 기자



이 연구원은 SK그룹의 주력 사업인 반도체와 통신 석유화학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SK그룹의 수익을 극대화하도록 도와주는 연구원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일은 SK경영경제연구소가 맡고 있다. 대신 사회적가치연구원은 SK의 사업과 무관하게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얼마나 만들어냈는지를 정교하게 측정하고 이들 기업에 성과급으로 적절한 인센티브를 집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단다.

“한마디로 ‘이런 연구원은 없다’는 것이 우리 연구원이 내세우는 모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가치를 계량적으로 측정하고, 그 성과만큼 보상을 해 주는 곳이 우리 연구원이 하는 일입니다. 인센티브를 줘서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더욱 높이도록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 우리의 미션입니다. 돈은 SK그룹에서 다 대줍니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돈을 쓰는 곳이지요.”


●돈벌이 기업 NO, 사회문제 해결 기업 YES

기업에 돈을 나눠주는 연구원이라고? 이런 ‘듣보잡’ 연구원이 있다니, 그럼 어떤 기업이 돈을 받고 있을까?

SK그룹은 2015년부터 사회적 기업을 발굴해 지원하고 있다. 6년째 벌이는 사업으로 해마다 40~50개 기업을 선발하고 이들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에 따라 인센티브를 나눠주고 있다. 인센티브는 돈이다. 보너스 성격인 셈. 물론 이 돈을 어떻게 쓸지는 오롯이 기업의 몫이다. 연구원은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 직원들 보너스를 줘도 되고, 회식이나 복지에 써도 무방하다. 물론 더 나은 성과를 위한 투자에 쓰는 것도 환영이다. ‘성과’란 단지 매출 증대, 이익 증가가 아니다. 사회적 가치, 그러니까 우리 사회를 얼마나 가치 있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더불어 사는 데,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를 따진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다른 연구소와 달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하는 곳이다. ‘이런 연구원은 없다’는 기치 아래 우리 사회를 밝게 비추고 헌신하는 사회적 기업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이들이 자본주의의 이기적 세상을 바꿔나가기를 도모한다. 이훈구 기자


“2015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기업을 발굴한지가 6년이 지났네요. 해마다 40~50개 기업을 선발했는데 지금은 285개나 됐습니다. 연구원에서는 이들 기업을 선정하고 육성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얼마나 창출했는지 계산하고, 그에 따라 인센티브를 줍니다. 2019년 활동을 기준으로 이들 기업이 낸 사회적 가치는 598억원이었습니다. 연구원에서 지급한 인센티브만 106억원에 이릅니다.”

2015년 이후 한 기업 당 평균 5000만원 안팎의 인센티브를 받고 있다. 이들 기업이 한 해 창출한 사회적 가치는 2억5000만~3억원에 이른다. 2019년의 경우 도우누리라는 회사는 인센티브로 6억2000만원이나 타갔다. 고용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높였나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또 다른 이름인 ‘Going Concern(영구 존속체)’이 되기 어렵다. 경영학 교과서에서는 고상한 말로 ‘주주 가치의 극대화’를 기업의 목표로 삼는다. 주식에 투자한 주주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경영학이 이처럼 ‘돈벌이’를 중시했다면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사회가치(social value)’에 목숨을 건다.

“스타스테크라는 회사가 있어요. 사업가는 경기영재고 출신인데, 불가사리로 제설제를 만들었어요. 어부도 불가사리는 잡히면 버리잖아요. 아무 쓸모가 없죠. 그런데 불가사리가 흡착력이 뛰어난 점에 착안해 이 사업가는 제설제를 만들 생각을 한 거에요. 눈이 많이 올 때 뿌리는 제설제는 염화칼슘인데 환경 오염을 유발하죠. 반면 불가사리 제설제는 이런 걱정이 없어요. 물론 수익성은 아무래도 떨어지겠죠. 하지만 쓸모없는 불가사리를 제설제 원료로 사용함으로써 바다의 골칫거리를 없애면서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 판 겁니다. 연구원에선 이 점을 평가해 2018년 3600만원, 2019년엔 1억2000만원을 인센티브로 지급했습니다.”

연구원이 평가한 이 회사의 사회적 가치 창출 효과는 2018년 1억5000만원, 2019년 4억3000만원이었다. 환경, 고용, 사회 서비스, 사회 생태계 등 4개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회적 가치가 얼마인지는 연구원에서 결정한다. 학계 등 전문가 그룹이 참여해 공정한 산식으로 평가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업이 돈을 벌더라도 ‘파이낸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자본시장에 제대로 전달되고 주주와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 회장이 2020년 10월 23일 열린 SK 2020 CEO 세미나에서 “파이낸셜 스토리로 더욱 큰 도약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 SK그룹 제공


“SK가 왜 이런 일에 나서느냐고요? 사실 정부가 이런 기업을 찾아 세금으로 보조금을 주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회 문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해결책은 산술급수적으로 더디게 진행됩니다. ‘정부의 실패’, ‘시장의 실패’라는 영역도 있지요. 우리 연구원이 사회적 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돈을 줘가면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카이스트 ‘사회적 기업가 MBA’ 지원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된 285개 기업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무엇보다 사회 문제를 풀겠다는 사업가의 의지가 중요하다. 장애인 휠체어를 저렴한 값에 만드는 회사인 토도웍스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모토로 만들어졌다.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직접 기른 농작물로 손자들에게 먹이려는 심정으로 건강 이유식을 만든 회사, 요양 돌봄 서비스 회사 등 다양한 업종들로 구성돼 있다.

나 원장은 “창업자가 사회 문제를 풀려고 하는 미션을 갖고 있는지를 눈 여겨 본다”면서 “회사 정관이나 계약서 등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제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돈을 쥐여주는 인센티브 뿐 아니라 최근엔 SK 전 현직 임직원이 재능 기부를 통해 기업의 판로 개척과 재무 상담 등 다양한 컨설팅을 통해 지원하고 있다. 스타트업이라고 다 되는 게 아니고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미션이 분명해야 한다.


한번 선발되면 얼마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나 원장은 “3년이 원칙이다. 그런데 너무 짧다는 의견이 많아 3+3으로 늘렸다. 성과가 좋으면 최대 6년까지 수혜를 받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지원을 받고 졸업한 44개 기업은 연구원이 만든 ‘히스토리 뮤지엄’이라는 유튜브에 등재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하버드대의 비즈니스 스쿨은 SK의 이런 활동을 담은 ‘SK Group: Social Progress Credits’라는 논문을 케이스 스터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KAIST와 손잡고 ‘사회적 기업가 MBA’를 운용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은 SK로부터 2년 전액 장학금을 지원 받는다. 조건은 나중에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는 것이다. 최고경영자가 얼마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행복 중시하는 SK 문화 마음에 들어

나석권 사회적가치연구원장은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SK그룹의 기업 문화가 마음에 든다”면서 “공직에 이어 이 곳에서도 공공 이익을 추가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연구원 입구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훈구 기자


나 원장에게 경제 관료의 길을 포기한 게 후회되지는 않는지 물었다.

“공무원으로 25년을 보냈습니다. 연공서열 위주로 운용되는 관료 사회에선 대과가 없으면 승진하는 구도이지요. 그러기에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도 있어요. 반면 민간 회사는 철저한 실적주의잖아요. SK로 옮기고 나서 1년 뒤에 바로 옆 사무실에서 짐을 빼는 임원을 봤어요. ‘아, 이게 민간이구나’ 생각했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민간은 개인 역량보다 팀워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해 보니 SK는 조직 문화가 너그럽고 유연한 것 같아요. 구성원의 행복을 중시하는 최고경영자의 철학도 다른 그룹과는 사뭇 다르죠. 무엇보다 공무원 때 하던 ‘public interest’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돼 지금 행복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최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새로운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구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시는 것 같은데 은퇴 후 사회적 기업가로서 존경 받을 수 있도록 잘 보좌할 것”이라면서 “SK가 국민에게 사랑 받는 기업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가 주목한 SK그룹의 사회적 가치 제고 실험의 주역인 나 원장의 행복한 미소가 드리운, 남산 자락에 위치한 사회적가치연구원의 모습이 6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아름다워 보였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