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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여왕이 된 발레리나 박세은 “제 춤이든 뭐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입력 | 2021-06-13 12:19:00

발레리나 박세은 인터뷰
352년 파리오페라발레단 역사 속 아시아인 최초 최고등급 무용수 탄생




“메리테(Meritez)!” “메리테(Meritez)!”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직후. 그는 무대 위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 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가 고마움을 표했다.

특히 박세은을 따뜻하게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말했다. 꾹꾹 감정을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도 그제야 터져버렸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너를 정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 으로 기다렸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공연에서 ‘로미오’ 역할을 맡아 그녀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동료 무용수 폴 마크를 비롯한 발레단 동료들은 하나 같이 박세은에게 “메리테”를 외치며 격하게 축하했다. 무대에서 펄쩍펄쩍 점프하며 박세은의 승급을 축하하는 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별 얘기가 아닌데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에투알 승급 발표 이후 박세은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처음 오디션을 보기 위해 프랑스에 왔던 순간부터 제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다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BOP는 영국 로열 발레단, 미국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승급과 서열 관리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최초다.

발레에 관심 많은 프랑스인들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새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 피가로,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RFI 등 주요 프랑스 언론도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하며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최초로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와 비견하며 의의를 설명했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 나는 걸 보니 사실 이제야 좀 실감나요. 승급 당일에는 무대를 잘 마치고 관객 앞에 섰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거든요. 팬데믹으로 워낙 오랜만에 선 무대잖아요. 그래도 귀가 후엔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샴페인 한 병을 나눠 같이 마셨어요.”

그는 “돌이켜 보니 저만 눈치가 진짜 없었던 것 같다”며 “공연 전부터 동료들이 제가 에투알이 확정된 것처럼 꽃다발도 준비하고 축하해줬는데 정작 저는 ‘이러다 승급 안 되면 어떡하려고 저러나’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다”며 웃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제 춤이든, 뭐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그녀도 새롭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선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예술감독, 안무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승급 후 면담에서 앞으로 1년 간 시즌 계획, 제가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더 좋아하는지, 잘 해낼 자신이 있는지도 조심스레 묻더라고요. 맨날 주어진 것만 하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에 진짜 낯설었어요. 수평적으로 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박세은은 16일(현지시간) 에투알이 된 후 처음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그간 발레 ‘오네긴’을 ‘최애작’으로 꼽아왔던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어버릴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에 임했다. 박세은은 “표현, 연기를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해 저를 많이 열리게 만든 작품”이라며 “매번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 붓는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상에 선 순간에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주택가 인근 작은 호텔을 잡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웬만한 화장실보다도 작은 방이라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이 너무 행복했단다. “이곳에서 춤추고 싶다는 확신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그는 3등을 했다.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단의 공연 DVD만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갑자기 그에게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이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박세은은 “사실 저를 좋게 본 네덜란드의 한 발레단에서 이미 제의를 받은 상태였어요. 상황이 바뀌어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가게 돼 미안하다. 네덜란드에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안무가가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고 했다. e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전해도 될 법했지만 박세은은 죄송스런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 그 안무가는 당시 박세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박세은은 “사람 인연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며 “2년 뒤 파리 오페라 승진시험 심사위원으로 그 분이 오셨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며 웃었다.

2005년 박세은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제가 살면서 처음 섰던 큰 무대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콩쿠르다. 너무너무 떨렸던 기억이 가득한데 상까지 타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회”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은은 2007년 로잔 콩쿠르 1위 등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했다.

박세은이라는 새 별이 파리에 뜬 날은 그간 하늘을 지키던 다른 별이 내려오는 날이기도 했다. BOP는 그간 에투알로 활약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엘레오노라 아바냐또의 영예로운 은퇴식을 열었다. 박세은은 “엘레오노라는 제가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할 수 있게 심사해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 “5년은 더 활약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지금도 정말 아름다운 에투알이다. 예술을 뿜어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 은퇴하기엔 아깝다”고 했다. 이어 “에투알이 되어 홀로 무대 중앙에서 인사를 하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녀만큼 관객에 감동을 주는 에투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고 덧붙였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나면 그는 9월 2021-2022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할 예정이다. “새 에투알을 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Etudes’의 개막작 오프닝 무대에 오른다. 엄청난 영예다. 또 시즌 오프닝 첫 무대에서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함께 행진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이 행사서 왕관을 쓰고 걷는다. “저도 이 행사는 정말 기대된다”며 기뻐했다.

에투알 지명 후 그녀는 귀가 길에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부모님이 통화 중 바로 눈물을 쏟자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데 스피커폰이야”라고 말하자 부모님도 “아 그래?”라며 눈물을 뚝 그쳤다고. “지금 제가 있는 것도 평생 저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10일 박세은의 무대를 지켜본 한 러시아 소녀는 박세은이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 장면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소녀는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이 얘기를 들은 박세은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제 목표는 사실 에투알이 아니었어요. 타이틀에 욕심을 갖지 않고 춤만 출 수 있으면 됐거든요. 진짜 목표는 그 소녀에게 전한 감동처럼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