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박세은 인터뷰 352년 파리오페라발레단 역사 속 아시아인 최초 최고등급 무용수 탄생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직후. 그는 무대 위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 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가 고마움을 표했다.
발레에 관심 많은 프랑스인들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새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 피가로,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RFI 등 주요 프랑스 언론도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하며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최초로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와 비견하며 의의를 설명했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 나는 걸 보니 사실 이제야 좀 실감나요. 승급 당일에는 무대를 잘 마치고 관객 앞에 섰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거든요. 팬데믹으로 워낙 오랜만에 선 무대잖아요. 그래도 귀가 후엔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샴페인 한 병을 나눠 같이 마셨어요.”
그는 “돌이켜 보니 저만 눈치가 진짜 없었던 것 같다”며 “공연 전부터 동료들이 제가 에투알이 확정된 것처럼 꽃다발도 준비하고 축하해줬는데 정작 저는 ‘이러다 승급 안 되면 어떡하려고 저러나’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다”며 웃었다.
박세은은 16일(현지시간) 에투알이 된 후 처음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그간 발레 ‘오네긴’을 ‘최애작’으로 꼽아왔던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어버릴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에 임했다. 박세은은 “표현, 연기를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해 저를 많이 열리게 만든 작품”이라며 “매번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 붓는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상에 선 순간에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주택가 인근 작은 호텔을 잡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웬만한 화장실보다도 작은 방이라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이 너무 행복했단다. “이곳에서 춤추고 싶다는 확신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그는 3등을 했다.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단의 공연 DVD만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갑자기 그에게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이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박세은은 “사실 저를 좋게 본 네덜란드의 한 발레단에서 이미 제의를 받은 상태였어요. 상황이 바뀌어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가게 돼 미안하다. 네덜란드에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안무가가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고 했다. e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전해도 될 법했지만 박세은은 죄송스런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 그 안무가는 당시 박세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박세은은 “사람 인연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며 “2년 뒤 파리 오페라 승진시험 심사위원으로 그 분이 오셨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며 웃었다.
박세은이라는 새 별이 파리에 뜬 날은 그간 하늘을 지키던 다른 별이 내려오는 날이기도 했다. BOP는 그간 에투알로 활약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엘레오노라 아바냐또의 영예로운 은퇴식을 열었다. 박세은은 “엘레오노라는 제가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할 수 있게 심사해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 “5년은 더 활약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지금도 정말 아름다운 에투알이다. 예술을 뿜어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 은퇴하기엔 아깝다”고 했다. 이어 “에투알이 되어 홀로 무대 중앙에서 인사를 하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녀만큼 관객에 감동을 주는 에투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고 덧붙였다.
에투알 지명 후 그녀는 귀가 길에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부모님이 통화 중 바로 눈물을 쏟자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데 스피커폰이야”라고 말하자 부모님도 “아 그래?”라며 눈물을 뚝 그쳤다고. “지금 제가 있는 것도 평생 저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제 목표는 사실 에투알이 아니었어요. 타이틀에 욕심을 갖지 않고 춤만 출 수 있으면 됐거든요. 진짜 목표는 그 소녀에게 전한 감동처럼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