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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별을 딴 박세은 “‘부 메리테’란 말,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입력 | 2021-06-14 03:00:00

352년 역사 파리오페라발레단서 아시아인 최초 수석무용수로 승급
“에투알 지명 후 예술감독으로부터 넌 자격이 있다는 축하 말에 눈물”
‘르피가로’ 등 프랑스 주요 언론들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 호평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을 맡아 연기하는 박세은 발레리나. 이 공연 후 ‘에투알’로 지명됐다. 그는 “이 작품은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기술보다는 연기가 중요하다. 특히 3막에선 감정 표현에 가장 집중해야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박세은 씨 제공

“메리테(Meritez·자격 있어)!” “메리테!”

발레리나 박세은(32)이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뒤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자 동료들이 외쳤다. BOP는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힌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처음이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갔다.

박세은을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이 그제야 터졌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으로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줄리엣을 연기한 그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로미오 역의 폴 마크를 비롯한 동료들은 “메리테(자격이 있다)”라고 외치며 축하했다.

“다른 표현보다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박세은은 12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디션을 보러 프랑스에 온 순간부터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프랑스인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피가로, 프랑스국제라디오방송(RFI) 등은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했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아르헨티나)와 비교하며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기사를 보니 이제 좀 실감난다. 승급 날엔 오랜만에 선 무대를 잘 마쳤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다”고 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지만 새롭게 주어진 ‘특권’을 듣고는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선택만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면담에서 앞으로 1년간 공연 계획,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원하고, 잘할 자신이 있는지까지 묻더라고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가 낯설었어요.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박세은이 ‘에투알’로 지명된 후 눈물을 참는 모습. 그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도 솔직히 그날 밤까지 실감이 안 났다”고 했다. 박세은 씨 제공

박세은은 16일(현지 시간)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에투알이 된 후 첫 공연이다.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연습했다. 박세은은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한 작품”이라며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붓고 있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박세은은 에투알로 지명된 순간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던 작은 호텔방에서 오디션을 준비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3등을 했다.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 DVD를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2005년 동아무용콩쿠르 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박세은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미국 IBC(잭슨 콩쿠르) 금상 없는 은상, 2007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1위,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금상까지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가운데 세 곳을 휩쓸었다. 2018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그는 9월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한다. “새 에투알을 관객에게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클래식 발레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에튀드’의 첫 무대에 오른다. 매년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행진하는 퍼포먼스 공연에서는 왕관을 쓰고 걸을 예정이다.

10일 박세은의 연기를 본 한 러시아 소녀는 페이스북에 커튼콜 영상을 올리며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고 썼다.

“제 진짜 목표는 소녀에게 그랬듯이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박세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