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아버지 폭력 피해 집 나가 홀로 살던 어머니 코로나 증세 악화에도 돌봐준 가족 없이 세상 떠나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 어머니 유골, 뒤늦게 마주한 아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된 뒤 4월 6일 홀로 숨진 채 발견된 김은숙(가명) 씨는 자녀들이 시신을 인계하지 않아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로 화장됐다. 경기 의왕시 봉안소 추모시설에 안치된 김 씨의 유골함을 취재기자가 응시하고 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그는 지금도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은 그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머니. 4월 6일. 서정수 씨(가명·40)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경기 의왕경찰서입니다. 어머니이신 김은숙(가명) 선생님이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수 씨와 큰 딸인 누나(45)는 어머니의 시신 인계를 거절했다. 둘째 딸은 연락도 닿지 않았다. 의왕시와 보건소는 유족으로부터 ‘사체 포기 각서’를 받아 4월7일 어머니 김 씨의 시신을 화장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지난해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올 5월 말까지 498일째 이어진 길고 긴 코로나19 재난 상황. 그동안 14만79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963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감염병 재난 국면에서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 덧없이 쓰러졌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하고 귀한 가족이자 이웃이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 9명(올 4월 말 기준)은 세상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죽음. 사랑하는 이의 배웅조차 받지 못한 고인. 오래 전 헤어진 딸과 아들이 시신 인계를 거절한 김은숙 씨(가명·67)도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였다.
김은숙 씨가 살았던 경기 의왕시 다세대주택. 김 씨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도 안 돼 홀로 방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021년 4월 3일 토요일 경기 의왕시의 다세대주택 101호. 김은숙 씨는 몸을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로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기를 벌써 며칠 째. 김 씨는 식사는커녕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도 못했다.
홀로 사는 그를 도와줄 가족은 없었다. 하필 옆집 102호 아주머니마저 가족을 만나러 간다며 한동안 집을 비웠다. 김 씨는 마지막 힘을 짜내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102호 아주머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김 씨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주말이 지나고 5일 월요일. 102호 아주머니와 또 다른 이웃은 김 씨를 부축해 근처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 병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부터 받을 것을 권했다. 이들은 다시 의왕보건소로 발길을 돌렸다.
6일 오전 8시50분경. 102호 아주머니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보건소였다.
“선생님,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 그런데 확진자와 밀접 접촉이라 2주 간 자가 격리를 하셔야 해요.”
김은숙 씨가 살던 경기 의왕시 다세대주택의 문 앞. 허리통증을 앓다가 4월 5일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김 씨는 다음날 홀로 숨진 채 방 안에서 발견됐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확진자는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였다. 102호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김 씨의 집 앞으로 뛰쳐갔다. 문을 두드리고 불러 봐도 반응이 없는 김 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집 안 형광등만 환히 켜져 있었다. 102호 아주머니는 다급히 119로 전화를 걸었다.
“옆 집 할머니가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요. …얼른 좀 와주세요.”
구급대가 긴급 출동해 잠겨 있는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이미 김 씨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오전 9시26분. 구급대는 의료 지도를 받아 김 씨의 사망 판정을 내렸다. 코로나19 확진자인 김 씨는 부검을 할 수 없었다. 방역당국의 역학조사도 불가능했다. 그의 정확한 사인과 사망시간은 모두 ‘불명’으로 남았다. 김 씨의 딸과 아들은 시신 인계를 거부했다.
1985년의 어느 날. 김 씨는 밤에 몰래 집을 나왔다. 잠들어있는 삼남매를 내버려둔 채였다. 아홉 살이었던 김 씨의 첫 딸만 잠결에 어렴풋이 기억하는 장면. 몇 살 터울의 동생들은 어머니가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도 보지 못했다.
집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김 씨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하는 남편. 임신 중일 때도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걸핏하면 “돈을 달라”며 집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생활비까지 몰래 가져갔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김 씨는 살고 싶었다. 언젠가 돈을 모아 아이들을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온 김 씨는 악착같이 살았다.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시누이인 아이들의 고모가 삼남매를 키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계에 지친 김 씨가 삼남매를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니 시누이는 단칼에 자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애들이 (자기들 버린) 엄마 안 만나고 싶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들을 떠나온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김 씨는 눈을 감을 때까지 시누이의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
2002년 의왕시.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아끼며 모으고 살았던 김 씨는 작은 호프집을 열었다. 가족을 떠나온 지 17년 만이었다. 테이블 몇 개뿐인 작은 호프집이었지만 김 씨는 큰 보람을 느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었다. 손맛이 좋고 정성껏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도 늘었다. 자정 넘어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김 씨는 씩씩하게 호프집을 꾸려갔다.
김은숙 씨가 운영한 호프집 내부에 냉장고와 보일러 등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김 씨는 이곳에서 19년 가까이 호프집을 운영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주변에서 여러 가게가 생기고 사라졌지만 김 씨의 호프집은 그 자리를 지켰다. 동네 상인과 주민들은 김 씨를 ‘터줏대감’이라고 불렀다. 터줏대감 김 씨는 가끔씩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헤어져 있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였다.
“삼남매가 멀리 경상도에서 시누이와 살고 있다고만 들었어요. 돈이라도 좀 부쳐주고 싶은데, 그걸 전달할 방법도 없네요.”
김 씨는 아이들 생각이 날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억지로 삼켰다.
2019년부터였다. 김 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발이 붓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심부전증에 고혈압 증세까지 온 김 씨는 약을 달고 살았다.
이듬해엔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김 씨는 몇 달 간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월세는 쌓이고 병원비 부담도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호프집에 나갔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온 김 씨. 그때는 다시 호프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김은숙 씨가 집 앞 화단에서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키운 식물. 김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화단은 이웃 주민이 관리해주고 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021년 5월 1일. 빗줄기는 강한 바람을 타고 조금씩 굵어졌고, 차량 와이퍼는 바쁘게 돌아갔다. 서정수 씨(가명·40)와 부인은 경남 김해시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의왕시에 도착했다. 다세대주택 101호 앞 화단에는 비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있었다. 주민 할아버지는 “김 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식물들”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지만 이렇게 떠나보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부인과 상의 끝에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곳에선 어머니의 사진도 나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 정수 씨는 사진을 찍어 함께 오지 못한 큰 누나(45)에게 보냈다.
“내 얼굴과 많이 닮았어….”
김 씨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삼남매였지만, 그들은 이미 삼남매가 아니었다. 정수 씨의 작은 누나는 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 씨가 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다. 정수 씨의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알코올중독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후 숨을 거뒀다.
시누이가 김 씨에게 전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큰 누나와 정수 씨는 친척들 손에 자라거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뒤 고아원에 버려져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친척들과는 연락이 닿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김 씨는 둘째 딸 죽은 건 아예 몰랐어. 언제나 삼남매 보고 싶다고 했지. 애들이 안 보고 싶어 해서 찾아갈 수 없다고 했어. 고모랑 친척들이 애들 거둬서 잘 키워주고 있다고만 믿었어. 김 씨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알고 갔어.” (이웃주민)
5월 2일 일요일. 정수 씨와 부인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호프집 정리도 끝냈다. 이를 지켜보던 맞은 편 슈퍼마켓 주인이 정수 씨 부부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건넸다. 이런저런 사연을 물어봐도 정수 씨는 불편해하거나 피곤한 티도 내지 않고 이야길 꺼냈다.
서정수 씨 부부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경기 의왕시를 찾은 5월 1일에는 비가 내리고 강한 바람도 불었다. 서 씨 부부는 다음날까지 의왕에서 머물며 어머니의 흔적을 정리하고 떠났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잠깐밖에 얘기를 못 나눴지만, 아들 부부가 참하고 착합디다. 평생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슈퍼마켓 주인)
아들 정수 씨는 언론과 직접 접촉하길 꺼렸다. 오랜 고민 끝에 부인이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한동안 힘들어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다른 유족과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어머니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그렇게 보낸 게 마음이 좋지 않았죠. (유품을 정리한 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말을 마치고 잠시 망설이던 정수 씨의 부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에 남편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자신들을 그리워했단 것을요.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떠난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어머님도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찾질 못 했던 거였네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바이러스에 확진돼 홀로 숨진 김은숙 씨가 살았던 다세대주택 앞 골목길. 김 씨는 매일 이 길을 지나 자신이 운영하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의왕=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김은숙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슴의 한이었던 삼남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결국 얼마나 아이들이 그리웠는지 한 마디 말도 못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이미 떠나 버린 고인. 의왕시 봉안소에 안치된 김은숙 씨의 유골은 말이 없다.
::히어로콘텐츠팀::
▽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
▽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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