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포토 에세이 펴낸 사진작가 라미 현
사진작가 라미 현이 10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전시된 6·25전쟁 참전용사 131명의 흑백사진을 두 손으로 받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을 찍은 그는 “참 전용사를 받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 왔다.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아흔의 노병이 제복을 꺼내 입었다. 오른팔은 포탄 파편에 맞아 온데간데없다. 수류탄에 잃은 오른 다리는 의족으로 대신했다. 왼팔과 왼 다리만으로는 제대로 서지 못해 지팡이를 짚었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만은 여전히 단단하다. 전쟁은 퇴역 군인의 육체를 망가뜨렸지만 영혼은 앗아가지 못했다. 1925년 미국에서 태어나 6·25전쟁에 참전한 미 육군 예비역 대령 윌리엄 빌 베버는 당당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동상의 모델 중 한 명이다.
사진작가 라미 현(본명 현효제·42)은 2018년부터 6차례에 걸쳐 그의 사진을 찍었다. 작가는 1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순간 느낀 통증을 물으니 베버 대령이 씩 웃으며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라고 대답했다.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건네자 ‘한국이 내게 빚진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책에 실린 미 해병대 출신의 살바토레 스칼라토는 라미 현이 처음 만난 6·25전쟁 참전용사다. 둘은 2016년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대한민국 방위산업전에서 사진작가와 초청 군인으로 처음 만났다. 2년 뒤 라미 현이 살바토레를 찾아 미국으로 갔지만 살바토레는 “사진을 팔러 온 거냐”며 삐딱하게 맞았다. 참전용사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준다며 돈을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라미 현은 살바토레를 겨우 설득해 사진을 찍었다.
그가 미국,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참전용사들의 사진과 영상을 찍는 데 든 비용은 약 5억 원. 외부에 손을 벌리지 않고 그가 다른 사진작업을 통해 번 돈으로 충당했다. 라미 현은 “정부에서 돈을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결국 돈 벌려고 하는 짓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싫었다”고 했다.
라미 현은 지난해 7월 별세한 백선엽 장군(1920∼2020)의 생전 모습도 사진으로 담았다. 2019년 당시 백 장군은 거동이 쉽지 않았지만 꼿꼿이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군인은 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부인의 만류로 백 장군이 결국 휠체어에 앉아 사진을 찍었는데 끝까지 부끄러워했다. 촬영 당시 99세였는데도 여전히 눈빛은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를 향해 전쟁을 미화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는 이미 벌어진 전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참전 군인들은 자신을 전장에서 죽은 동료를 두고 온 겁쟁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인정할 때에야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