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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유재동]“실업급여 대신 받아드립니다”

입력 | 2021-06-15 03:00:00

역대급 美 구인난 이면엔 지나친 복지
기본소득 이슈 불붙는 한국에 시사점



유재동 뉴욕특파원


며칠 전 동네 레스토랑에 갔다. 그날따라 주문하려는 손님 줄은 유난히 길고, 음식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한눈에도 식당 인기에 비해 종업원 수가 너무 부족해 보였다. 카운터 직원은 주문을 받다가 주방을 오가고 커피까지 내리느라 줄 선 이들을 계속 외면했다. 바쁜 사정이 빤히 보여 보채거나 뭐라 항의할 수도 없었다.

이런 모습은 요즘 뉴욕 식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백신 효과로 레스토랑에 다시 고객이 몰려들고 있지만 직원을 새로 구할 수 없다 보니 서빙이 너무 늦다. 그래서 이젠 식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계산서부터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눈에 자주 띈다. 음식값을 내려고 뒤늦게 직원을 찾느라 시간을 뺏기느니, 미리 계산을 마쳐놓고 늦지 않게 자리를 뜨려는 것이다.

요즘 미국의 구인난은 가히 ‘역대급’이라고 한다. 맨해튼 거리에서도 가게마다 사람을 구한다는 안내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업률은 팬데믹 이전보다 여전히 훨씬 높은 수준이다. 경기 회복으로 일자리는 많이 생겼지만 정작 일하려는 사람이 부족해 생긴 현상이다. 이유가 뭘까. 얼마 전 겪은 일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데 한 백인 청년이 대뜸 내 직업을 물어보더니 명함을 건넸다. 거기엔 전화번호와 함께 이런 글이 써 있었다. ‘실업급여 대신 받아드립니다. 당신도 자격이 됩니다.’

미국의 평균 실업급여(수당)는 주당 387달러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연방정부가 여기에 300달러의 추가 수당을 얹어주기 시작했다. 결국 한 명의 실업자에게 지급되는 돈이 일주일에 687달러(약 76만 원), 연간 3만6000달러(약 4000만 원)에 이른다. 이런 돈을 놀면서도 받을 수 있으니 팬데믹에 직장을 잃었던 사람들로선 다시 일터에 복귀할 이유가 없다. 실업급여는 수혜 대상이 넓고 시스템에 허점이 많아 수급자 중엔 무자격자나 취지에 안 맞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수당을 대리로 청구하고 수수료를 받는 신종 컨설팅업이 생겨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가 커지자 일부 주(州)들은 향후 실업급여 액수를 줄이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평소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조 바이든 대통령도 “적당한 일자리를 제안받고도 이를 거부한다면 앞으로 수당을 못 받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눈먼 돈’을 좇는 사람들의 기민함을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행정력이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작년 3월 이후 집행된 전체 실업급여의 최소 10%가량(890억 달러)이 사기 또는 중복으로 부적절하게 지급됐다. 남의 실업급여를 훔치기 위해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사회보장번호(SSN)를 빼내는 피싱 범죄도 갈수록 판을 치고 있다.

팬데믹 기간에 각국이 보여준 실업대책에는 그 사회의 특성이 잘 반영돼 있다. 유럽이 촘촘한 복지제도를 앞세워 근로자의 경력 단절을 막고 실업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국은 기업의 해고를 용인하는 대신 막대한 재정을 동원해 실업자들을 빠른 시간에 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돈이 엉뚱하게 지급됐고, 결국 실직자의 재취업을 지원한다며 만든 제도가 오히려 이들의 재기를 막는 ‘복지의 역설’이 빚어지고 말았다. 미국의 이런 상황은 기본소득과 무상복지가 또다시 선거 이슈로 부상한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늘 그랬듯이 유권자들은 후보들이 세금을 ‘어떻게 걷고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지를 이번에도 잘 따져봐야 한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