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떻게 보이느냐’가 좌우하는 세계다. 나는 옷을 입을 때마다 이 원칙을 염두에 둔다.”
패셔니스타로 이름을 날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는 자서전 ‘비커밍’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버드 법대 출신의 공부벌레로 외모를 꾸미는 일에는 관심 없던 그녀가 남편의 정치 입문과 함께 패션의 정치적 효과를 깨닫게 됐다는 것이죠.
최근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주목 받은 ‘핑크 3총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벼락 결혼식’을 올린 뒤 이번 행사의 안주인 역할을 한 케리 시먼즈 총리 부인, 질 바이든 미국 퍼스트레이디,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비(왼쪽부터). 서로 맞춰 입은 듯 비슷한 핑크 계열의 의상을 입었다. 더선
바이든 여사는 G7에서 ‘패션 리사이클링’이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대개 유명인들은 한 번 입고 공개석상에 등장했던 옷을 다시 입는 것을 꺼립니다. 하지만 ‘한번 입었다고 해서 비싼 옷들을 옷장 속에서 썩힐 필요는 없다’는 것이 질의 패션관인 듯 합니다. G7 때 입었던 대부분 옷들이 ‘재활용’ 패션입니다.
G7 개막 리셉션에서 입었던 오스카 드 라렌타표 꽃무늬 원피스는 지난해 남편의 대선 승리 후 대국민연설 때 입은 옷입니다. 당시 눈도장이 확실히 찍혔던 의상인데도 카메라 플래시가 집중적으로 터지는 G7 개막식에서 또 다시 선보인 것이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부부를 만날 때 입은 등 쪽에 ‘LOVE’라고 새겨진 자딕앤볼테르 브랜드의 재킷은 2019년 남편 대선 유세 때 처음 입은 뒤 몇 차례 입었습니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와 함께 지역 초등학교 방문 때 선보인 핑크색 재킷과 안에 받쳐 입은 흰색 원피스는 4월 일리노이 주 대학 방문 때 입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대선 승리 연설 때 입었던 꽃무늬 원피스를 G7에서 다시 입은 질 바이든 여사. 오른쪽은 지난 대선 때, 왼쪽은 G7에서 모습이다. 이 의상은 패션 브랜드 오스카 드 라렌타의 한국계 총괄 디자이너인 로라 김이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동료와 공동 작업했다. 피플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가리켜 “주저하는 패셔니스타(Reluctant Fashionista)”라고 부릅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직함 때문에 얼떨결에 패션 리더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죠. ‘곱창밴드’ 사건은 어쩌다 보니 패셔니스타가 된 그녀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질은 지난 밸런타인데이 때 한국에서 ‘곱창밴드’로 불리는 천 고무줄 밴드로 머리를 묶고 마카롱 가게에서 남편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어마어마한 환호를 받습니다. 유행이 지난 아이템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철칙인 냉엄한 패션의 세계에서 1980~90년대 유행했던 곱창밴드로 머리를 묶은 그녀의 소박한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죠. 일명 ‘곱창밴드 영부인’의 탄생입니다.
미국 여성들의 환호를 받은 질의 헤어 고무줄 밴드. 한국에서는 “곱창밴드,” 미국에서는 “스크런치(Scrunchie)”로 불린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스크런치를 좋아하는데 요즘 유행이 아니라서 못 쓰고 있었다. 퍼스트레이디 덕분에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비즈니스인사이더
비주얼이 중시되는 현대 정치에서 퍼스트레이디에게 패션은 사치가 아닌 필수가 되는 추세입니다. 패션에 유달리 관심이 많던 미국 퍼스트레이디로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남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베티 포드 여사(남편 제럴딘 포드 대통령), 낸시 레이건 여사(남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등이 꼽힙니다. 반면 패션과 담 쌓고 살았던 퍼스트레이디로는 로절린 카터 여사(남편 지미 카터 전 대통령)가 있습니다. 그래도 전담 스타일리스트와 미용사가 있고, 의상 구매 담당자도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백악관 안주인들은 금세 ‘환골탈태’합니다. 도수 높은 안경에 값싼 기성복 슈트 차림으로 놀림을 받았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퍼스트레이디를 지내면서 갈고 닦아 나중에는 패션지 표지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수수한 차림으로 애견 두 마리에 함께 코로나19 관련 TV 공익 광고를 찍고 있는 질 바이든 여사. 백악관 홈페이지
새로운 유형의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제스처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미국 퍼스트레이디의 최우선 역할은 ‘패션 내조’라는 인식이 너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바이든 여사에게 앞으로 3년 반은 패션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적당한 균형을 잡아가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