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단체 HRW ‘한국 보고서’
“칼이나 흉기만 안 썼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정신에 대한 살인이에요.”
16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발표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성범죄’에 실린 강유진(가명) 씨의 말이다. 강 씨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다. 그의 전 남자친구 A 씨는 강 씨 얼굴을 합성한 나체 사진을 강 씨의 집 주소, 전화번호와 함께 인터넷에 올렸다. 강 씨는 “(게시물) 삭제 요청서 하나를 작성하는 데 10∼20분이 걸렸다. 하지만 하나를 지우는 사이 10개가 새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강 씨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가해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사회로 복귀했다.
○ 5년 만에 10배로 늘어난 디지털성범죄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HRW) 여성권리국 공동디렉터가 14일 동아일보와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실제 국내 디지털성범죄는 급증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15년 3768건이던 디지털성범죄 관련 신고 건수는 2020년 3만5603건으로 10배 가까이로 늘었다.
보고서는 한국 디지털성범죄를 △불법 촬영 △영상물·사진의 불법 공유 △사진을 조작·합성해 협박 등 3가지로 분류했다. 이와 관련한 피해도 소개했다. 이예린(가명) 씨는 회사 상사에게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계는 촬영기기가 장착된 몰래카메라였다. 상사가 이 씨의 일상을 훔쳐보기 위해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시계를 선물한 것이다.
○ “긴급삭제명령 제도 도입해야”
디지털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사법처리가 여전히 미온적인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최지은(가명) 씨는 낯선 남성이 집 창문 너머로 2주 동안 불법 촬영을 하는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인 B 씨는 최 씨 외에도 7명의 여성을 불법 촬영했다. 하지만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직업이 있고, 결혼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이유였다.
보고서는 수사기관에 대해선 디지털성범죄 전문 인력과 여성 인력을 늘리고, 영상 삭제 등 피해 복구 비용을 가해자에게 손쉽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피해 복구 비용을 가해자가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신도 이번 보고서 발표에 주목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한국이 전 세계 불법 촬영의 중심지가 됐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디지털성범죄 연루자에 대해 엄중한 수사를 지시한 내용도 보도했다.
이지윤 asap@donga.com·신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