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계의 유예 요청 수용 안해 영세기업들 “인력난 외면한 정책”
당장 사람 구하기도 힘든데… 다음 달부터 5∼49인 사업장에도 주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된다. 중소기업들은 인력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행되는 근로시간 규제에 애로를 호소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한 금속공장에서 기술인력이 작업하는 모습.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경남에서 선박부품업체를 운영 중인 A 씨는 16일 오후 전 직원 17명을 모두 불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날 정부가 계도기간 없이 주 52시간제를 시행한다는 발표를 들은 직후다. A 씨는 회의에서 “앞으론 야근수당을 지급할 수 없어 임금 감소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직원이 “대체 얼마나 임금이 줄어드느냐”고 물었지만 답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에 민감한 조선업 특성상 일감이 몰릴 때 벌어들이는 돈이 생명 줄과 다름없다”며 “이때 일하는 시간을 제한해버리면 도대체 언제 돈을 벌라는 것이냐”라고 했다.
이날 정부는 근로자 50명 미만 기업의 주 52시간제 적용을 예정대로 7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경제단체가 영세기업의 부담을 이유로 유예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다음 달부터 주 52시간제 근무를 지켜야 할 기업은 전국적으로 약 78만 곳이다. 근로자 수가 5∼49명인 기업이다. 2018년 7월 300인 이상 기업부터 시작된 주 52시간제는 3년 만에 전면 시행을 맞게 됐다.
앞으로 사업주는 근로자의 주 52시간 근무를 보장하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았다가 법 위반으로 기소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에 앞서 최장 4개월의 시정기간이 주어진다. 고용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국인 근로자가 입국하지 못해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기업에 대해서는 특별연장근로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영세기업 관계자들은 만성적 인력난을 감안하지 않은 대책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5~49인 기업도 7월부터 계도기간 없이 ‘주52시간’ 시행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의 한 금속공장. 내부에서 인기척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자동차부품 등에 쓰이는 특수강을 자르는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갈 뿐이었다. 요란한 기계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때쯤 겨우 현장 노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공장에서 기계 10대를 관리하는 인력은 단 2명뿐이다.
직원이 13명인 이 업체는 최근 경기 회복 조짐과 함께 주문량이 늘었지만 추가 채용 계획은 없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등에 대비해 현장 관리 인력을 줄이는 대신 자동화 기계 설비를 늘리는 상황이다. 기계 1대당 3억∼5억 원이 들어가도 직원을 채용해 각종 규제를 받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기계 작동 상황을 살피던 이모 대표(66)는 “기계는 밤새 돌릴 수 있어 주 52시간제와 무관하다”며 “인력 채용은 앞으로도 최소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정부가 7월부터 50인 미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주 52시간제 시행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자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계도기간(처벌 유예기간)을 부여하는 등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은 당장 주 52시간제를 도입하기에는 근로시간 조정이 어려워 사업에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금속가공업체를 운영하는 A 대표(71)는 영세기업의 고질병인 ‘인력난’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직원들은 연장근로 수당을 받아 월급을 불렸는데 근무시간이 제한되면 수당이 적어지면서 직원 이탈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 그는 “일이 고되고, 화학물질 접촉 비율이 높다 보니 일을 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며 “주 52시간제로 남아 있던 인력마저 나가면 공장을 어떻게 꾸릴지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폴리염화비닐(PVC) 플라스틱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B 대표(68)도 “늘어나는 적자를 바라보며 주 52시간제 위반으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지 노심초사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는데, 누가 제조업을 하겠다고 나서겠느냐”며 “주변 사장님들 모두 회사 팔 궁리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송혜미 1am@donga.com·김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