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앨범’이라는 비문(非文)의 이율배반을 깨부수려면 무릇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최근 24분 33초짜리 신곡을 낸 밴드 ‘실리카겔’.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춘추, 김한주, 최웅희, 김건재. 실리카겔 제공
임희윤 기자
‘가수 ○○○, 여름 겨냥해 싱글 앨범 내놔’
보도 자료나 인터넷 기사에서 자주 접하는 ‘싱글 앨범’이라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늘 불편했다. 애당초 싱글과 앨범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싱글은 곡 단위로 발표되는 작품을, 앨범은 여러 곡을 모아놓은 작품집을 늘 의미했다. 그러니 싱글 앨범이란 마치 ‘냉찌개’나 ‘솔로 그룹’처럼 양립 불가의 개념이고 이율배반적 단어이자 잘못 통용되는 말이다.
#2.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년), 스매싱 펌킨스의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1995년) 같은 서사적 앨범을 들으며 ‘이런 게 앨범의 맛!’이라 되뇌던 필자에게는 3분짜리 한 곡에 경음악 버전 하나 붙여놓고 ‘싱글 앨범’이라 우기는 일이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류 대중 예술의 개념이 대변혁을 겪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감히 ‘내 맘대로 절충안’을 제시해 본다.
#3. 첫째, ‘싱글 앨범’이라 칭하려면 무릇 한 곡의 길이가 6분은 넘어야 한다.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4분 50초)는 유장한 제목과 별개로 아쉽지만 탈락이다. 버브의 ‘Bitter Sweet Symphony’(5분 58초)에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적어도 오아시스의 ‘Champagne Supernova’(7분 31초) 정도는 돼야 합격.
#4. 둘째, 10분을 넘기면 ᄒᆞᆫ글 기준 글자 크기 ‘15’ 이상으로 당당히 ‘싱글 앨범’이라 써 붙일 수 있도록 하자. 많은 노래가 떠오른다. 주로 옛날 노래인데 하나같이 명곡이다. 우선 도어스의 ‘The End’(11분 43초)가 들어가겠다. 주술적 기타 리프 위로 탬버린이 방울뱀처럼 올라타면 짐 모리슨(1943∼1971)의 염세적 읊조림이 나타나 파국의 문을 연다.
#5. 오, 밥 딜런은 야속하다. 엇비슷한 코드 진행과 멜로디를 끝없이 반복하며 오디오북 낭독하듯 가사를 줄줄 읊는 ‘Desolation Row’(11분 21초·1965년)를 냈던 그는 지난해에도 ‘Murder Most Foul’(16분 54초)로 고매하신 평단을 사로잡았다.
#7. 긴 곡이 록 시대 아재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23분짜리 곡 하나보다 2분 30초짜리 곡 열 개로 승부를 봐야 유리한 플레이리스트(추천 재생 목록)의 시대에도 가히 싱글 앨범이라 불릴 만한 기나긴 곡은 나온다. R&B 싱어송라이터 프랭크 오션의 ‘Pyramids’(9분 52초·2012년)는 간과할 수 없는 긴 명곡이다. 미국 가수 쿠코가 ‘Lover is a Day’(7분 36초·2016년)에서 들려주는, 물에 잠긴 형광 셀로판지 같은 감성은 프린스의 ‘Purple Rain’(8분 40초·1984년)의 보랏빛 습기에 뒤지지 않는다.
#8. 비상한 재능을 지닌 20대 4인조 밴드 ‘실리카겔’이 얼마 전 신곡 ‘S G T A P E - 01’을 발표했다. 24분 33초짜리 곡이다. 인상적인 멜로디가 빼곡하다. 여러 곡으로 잘라 내지 그랬냐고 물으니 보컬 김한주가 답했다.
“청개구리 한번 돼보고 싶었다.”
내일은 이 곡을 들으며 회사 앞 산책을 해야겠다. 청계천 시작점에서 광통교를 지나 정조 능행 반차도를 찍고 돌아오면 딱 맞을 것 같다. 진짜 ‘싱글 앨범’의 시대는 이렇게 계속된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