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인 티보 ‘파크 플레이스’, 1995년.
송화선 신동아 기자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도맡아 하며 간신히 살림을 꾸리고 있는 간호사 엄마가 듣기엔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우리 집은 사립대 학비를 대줄 만한 형편이 안 돼. 게다가 너는 공부도 잘 못하잖아. 근처 대학을 가렴.”
차 안에서 시작된 모녀의 다툼은, 딸이 달리는 차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림으로써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돌발 행동으로 팔을 다친 레이디 버드는 핑크색 깁스를 한 채 새크라멘토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의 머리 위엔 놀랍게도 이 소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팔 위 깁스와 같은 색 하늘이 펼쳐져 있다. 태양빛을 듬뿍 머금어 마치 핑크색 호수처럼 보이는 새크라멘토의 하늘. 문득 화가 웨인 티보(1920∼)의 그림에서 바로 저런 하늘색을 봤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며 떠올린 바로 그 작품 ‘파크 플레이스’(1995년)는 캔버스 거의 절반을 온화한 핑크색으로 채웠다. 그 아래로 연푸른색 고층 건물과 녹색 언덕이 어우러진다. 화가가 사용한 색은 하나같이 평화롭고 목가적인데, 가파르게 경사진 도로가 화면을 좌우로 분할하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 그림은 일견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실은 숱한 고민과 아픔이 잠복돼 있는 레이디 버드의 사춘기를 연상시킨다.
“제발 우리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게 하소서. 스무 살 시절 도토리가 톡, 톡 떨어져 내리는 학교 뒷숲에 시집을 끼고 앉아서 그들은 말하곤 했었다.” 역시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다 떠오른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무슨 일이든 일어났으면, 그것이 비록 나쁜 일일지라도’를 외치던 소녀들이 ‘이젠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다’고 말하는 나이가 된 시점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지 모른다. 핑크색을 잃고, 마음에 가득하던 불안함에 대한 동경을 잃는 것.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레이디 버드는 고교 생활을 마무리하며, 화사한 핑크색이던 자기 방 벽을 흰색으로 덧칠한다. 그리고 잿빛 하늘이 펼쳐진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토록 답답해하던 새크라멘토 바깥에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