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어디서 살까-주거탐구① ‘무료 골프’ 앞세운 은퇴자 공동체 美 플로리다 ‘더 빌리지’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 큰 은퇴자 공동체 1980년대 이래 노인층 빨아들이며 폭풍 성장 은퇴 노인들 여가 중심으로 노후 만끽하는 장소 평등 이념으로 은퇴 세대의 상실감 채워줘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노후에 어디서 살 것인지는 큰 화두다. 사는 곳에 따라 고령자의 삶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어디에서 삶의 질을 유지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모색하며 늙어갈 것인가. 정답은 없다. 경제적 여건과 건강, 사고방식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돌봄이나 간병을 필요로 하는 상황까지 검토할 필요도 있다.
요즘은 지구촌 전체가 늙어가는 시대다. 고령자들이 사는 곳에 대한 연구와 실험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조지프 코글린 미국 MIT(매사추세츠공대) 에이징랩 소장은 ‘장수경제학’을 다룬 저서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the Longevity Economy·부키)’에서 두 가지 유형의 노인 주거를 비교했다. 1980년대 시작돼 미국에서 폭풍 성장 중인 플로리다 주의 은퇴 공동체 ‘더 빌리지(the Villages)’와 2000년대 이후 미국 베이비 부머 중심으로 자신이 살던 집에서 나이 들어가며 느슨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우선 은퇴 공동체 ‘더 빌리지’부터 알아보자.
더 빌리지의 건강체조모임. 55세 이상 은퇴노인들이 주 2000가지 이상의 프로그램을 운용하며 활력을 지켜가고 있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은퇴자 공동체
햇살 가득한 미국 플로리다 주 중부 83㎢(약 2510만 평)에 조성된 ‘더 빌리지’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은퇴자 공동체다. 골프 코스와 어우러져 들어선 지역 내 주택들은 55세 이상(부부 중 1명)에게만 분양하고 19세 이하는 연간 30일까지만 방문을 허용한다. 말 그대로 노인전용 마을이다. 공공시설은 마치 디즈니랜드를 옮겨놓은 듯 아름답다.주민들은 골프뿐 아니라 테니스와 수영과 낚시, 스쿼시 등 갖가지 스포츠를 즐긴다. 은퇴자들이 활기를 누리며 인생을 만끽하는 곳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미국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8년 발표된 미국 인구조사 결과 이곳 인구는 2010년 9만4279명에서 2017년 12만5165명으로 32.8%가 늘었다.
더 빌리지의 아이디어는 1960년 애리조나 주에 건설한 최초의 은퇴자 공동체 ‘더 선 시티(the Sun City)’에서 얻어왔다. 세계 최초로 종합개발계획으로 건설된 선 시티는 가까운 도시와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건설된 고립된 도시였지만 아름답고 주민이 3만 명 이상 모여든 덕분에 자립 운영이 가능했다.
위에서 본 더 빌리지. 아담한 크기의 주택들이 골프코스들과 어울려 배치돼 있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
○미국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율
1960년대에 플로리다 주의 값싼 땅을 떠안게 된 부동산업자 헤럴드 슈바르츠는 73세가 된 1983년 ‘선 시티’를 둘러보고 온 뒤 돌파구를 찾아냈다. 플로리다식 선 시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유인책은 ‘무료 골프(free golf)’라는 단 두 단어. 조경사에게 인근 수박밭을 엎어 잔디를 심고 물웅덩이와 모래구덩이를 몇 군데 파게 했다. 그리곤 땅에 조그만 구멍 9개 내고 깃대를 꽂았다.
빌리지에서는 구불구불 뻗어나간 마을 어디서나 골프 카트가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빌리지 내에서만 5만여 대의 골프 카트가 돌아다닌다. 한 번은 온 동네 골프 카트를 동원해 행진을 벌여 기네스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저속으로 달리는 골프 카트는 노인들의 교통 문제를 톡톡히 해결해줬다. 더 이상 자동차 운전면허 갱신이 어려워진 노인들도 골프 카트로 자립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골프가 아니어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레저 시설이 많다. 매주 2000개 이상의 주중 활동이 주민을 대상으로 열리며 레크리에이션 부서가 정성을 다해 운영한다. 밤에는 파티를 여는 집들로 떠들썩하고 술집과 클럽 풍경은 마치 대학촌 같다. 포도주가 맥주처럼 흘러넘치고 맥주는 물처럼 콸콸 쏟아졌다. 몇몇 레스토랑은 땅 밑에 수송관을 심어 지역 양조장과 연결돼 있다.
더 빌리지에 각인된 DNA는 ‘골프’다. 모든 주민은 40개의 9홀코스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전문가용 18홀과 27홀 코스 12개는 이용료를 할인받을 수 있다. 마을 전역을 5만대가 넘는 골프 카트가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
○고령자, 정체성 고민을 잊어라
사회 관습상 나이를 기준으로 은퇴가 이뤄지는 현대 사회에서 고령자를 괴롭혀온 것은 정체성 문제다. 일을 안 하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무력감에 빠지기 쉬웠다. 은퇴라는 개념이 도입된 초기에는 ‘황금빛 노후’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수명이 늘고 기술이 진보하고 가족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다. 고령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할 나이가 오면 미지의 신세계와 조우해야 한다. 은퇴 공동체는 이럴 때 ‘이런 삶도 있다’며 마음속에 숨겨둔 대안과 같다. 늙어서 어디서 뭘 하며 지낼 것인가라는 고민에 답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잠시도 외로울 틈 없는 활기찬 노후 생활
더 빌리지에서는 항상 즐거운 일을 만들어내고 일정표가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이렇다. 섣달 그믐날 오후 대장격인 리 씨가 새해 전야를 멋지게 보낼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우린 여러 집에 들를 거예요. 뭔가를 꼭 들고 가야 해요. 첫 번째 집에서는 집주인이 와인을 제공할 겁니다. 우리는 와인 잔만 들고 가지요. 그 집을 나와 다음 집에 가선 간단한 요리를 집어 먹고요, 다시 우르르 다음 집으로 건너가 커피와 후식을 먹고, 마지막 집에 가서 샴페인을 들어요. 이웃을 외롭게 혼자 내버려두는 일은 없어요. 모두 밖으로 나와서 걸으며 함성을 질러요. 골프 카트를 몰고 싶은 사람은 몰고….”주민들은 매일 이웃과 어울리며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주어진 하루하루 무엇을 할지 알게 된다고 한다. 은퇴 후 낯선 삶의 단계와 맞닥뜨린 세대에게 이런 생활이 발휘하는 설득력은 대단하다. 은퇴자는 이곳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빌리지에 부모가 이주한 뒤 40대 자녀 부부가 정문 바로 앞에 집을 구하고 입주할 시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부는 막 10살이 된 막내딸이 빌리지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19세가 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다양한 클럽 활동들이 펼쳐진다. 저녁마다 식당과 카페에서는 대학촌과 같은 활기가 넘친다고. 카약 동호회도 있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
○집 한 채에 연금이면 걱정 없는 생활
이 곳에선 다양한 활동이 제공되면서도 생각보다 생활비가 싸다는 게 매력을 더한다. 빌리지 회원이 되려면 55세 이상(부부 중 1명)인 사람이 빌리지 내에 단독 주택을 구입하고 월 164달러의 시설이용료를 내면 된다. 시설 이용료를 내면 골프부터 헬스클럽, 수영장, 낚시장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를 보면 생활비로 시설이용료 164달러를 포함해 세금과 보험료, 수도전기료 등 월 1000달러 정도 예상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실제 생활비는 여기에 식비와 의복비가 추가돼야 한다. 집은 대부분 30평대의 방 2~3개짜리에 마당이 딸린 단층 주택들로 거실, 부엌, 차고를 갖췄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보면 우리 돈으로 1억 원대부터 8억 원대 까지 다양하다.
지역 내 멋진 레스토랑이 많은데 할인 시간대에는 맥주가 탄산음료보다 쌀 정도로 물가가 낮다고 한다. 주민들이 “집 한 채만 있으면 연금만으로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이유다.
○‘평생 수고한 은퇴자가 백만장자처럼 여생 즐기는 공간’
빌리지 개발자는 이 곳에 일종의 이상을 담았다고 말한다.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한 사람, 퇴직연금과 사회보장연금을 타는 사람들이 집 한 채만 있으면 백만장자처럼 여보란 듯 사는 공간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급진적이라 해도 될 만큼 ‘평등’이란 개념이 중시된다. 이들은 자동차보다 골프 카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집도 엇비슷하다. 환한 도로와 카트 길도, 편의 시설도 함께 누린다. 과시적 소비를 할 필요도 없다. 명품 같은 건 모두 나눠쓴다. 주민들은 수준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고 친절하고 행복해 보인다. 과거에 뭘 했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한국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듯하다). 평등이란 측면에서 보면 더 빌리지는 왕가 자제와 서민 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대학기숙사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여기 사는 한 퇴역 장군은 “과거에 뭘 했는지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면 평생 자신의 직책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려던 욕구도 사라진다”고 했다.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빌리지에 매물로 나온 집들의 외부와 내부. 더 빌리지 홈페이지.
○‘노인이란 인색하고 이기적인 존재’ 인식 줄 우려
빌리지의 삶의 방식은 엄청난 매력이 있고, 그곳에 사는 노인이 행복한 것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빌리지가 성장할수록 비판도 적지 않다. 우선 빌리지가 다른 세대나 사회와 유리된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선 시티나 빌리지는 젊은이와 아이들을 경계하고 때에 따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은퇴 노인들이 세금이나 지역사회 공헌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은퇴 공동체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교육에 대한 투자도 관심이 없다.
실제로 1960년 만들어진 애리조나 주 선 시티 주민들이 1962년부터 수십 년간 17개 학교채권 의안(議案)을 부결시켰고 그 결과 예산 부족으로 지역교육청은 2부제로 학생을 교육해야 했다고 한다. 결국 “노인들은 차세대 교육에는 관심 없고 현역 세대가 부담하는 근로소득세 덕에 연금을 받아 펑펑 쓰며 인생을 즐기는 이기적 존재들”이라는 시선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코글린 박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빌리지가 발산하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매력적이어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메시지가 세상이 노년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을 뒤틀고 노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의 사고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셀프 부양의 시대
보건복지부가 7일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83.8%가 현재 집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원했다. 자기 집에서 최후까지 지내겠다는 바람은 사실 다른 많은 선진국 노인들에게서도 확인되는 공통된 현상이다.이런 가운데 ‘더 빌리지’처럼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확산세가 두드러진, 또 다른 ‘마을’의 형태가 있다. 자신의 집에서 자식이나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후를 즐겁게 보내려 하는 또 다른 움직임이다. 다음 회에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