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스탠딩 코미디를 본다는 것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성난 황소’ 장면. 편집증·불안과 싸워 온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니로)는 복싱계를 떠나 스탠딩 코미디언이 된다. 사진 출처 IMDb
동북아구술문화연구회(동북구연)에 다녀왔다. 이렇게 말하면 학회에 다녀온 줄 알겠지만 동북구연은 학회가 아니라 젊은 스탠딩 코미디언 모임이다. 당신이 소파에 누워 TV 코미디 프로를 시청하는 동안 이 젊은이들은 서울 을지로에서 격주로 만나 자신들의 농담 실력을 갈고닦아 왔다. 아무나 이들의 예리한 공연에 초대받는 것은 아니다. 정당 대표, 대선 후보, 대학의 학장처럼 인생에 일견 긍정적인 이들은 초대받지 않는다. 그들의 초대를 받으려면 건실한 비관주의자나 따뜻한 인간 혐오자가 되어야 한다.
동북구연 회장이 공연을 하루 앞두고 문자를 보내왔다. “주.글.것.가.타.요. 울면서 내려올까 봐.” 마침내 대망의 공연일. 1980년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을지로. 그 오래된 빌딩 5층 옥상에 모인 청중들 머리 위로 태양이 붉게 저문다. 6월의 이 청량한 저녁 옥상은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지상천국을 닮았다. 그러나 농담이 실패한다면 코미디언들도 이 천국 같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지겠지. 투신한 코미디언은 ‘스탠딩’ 코미디를 할 수 없다. 서 있을 수 없으니까.
동북아구술문화연구회의 스탠딩 코미디 공연 포스터.
라모타는 성난 황소처럼 돌진하는 복서였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몰락한다. 상대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그의 복싱 스타일은 권투가 아니라 광인의 구타를 닮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링 밖에서 사람들을 구타한다. 동생을 구타하고, 친구를 구타하고, 동업자를 구타하고, 아내를 구타한다. 모질고 불같은 성격이 그를 링 안의 챔피언으로 만들었지만, 링 밖에서는 바로 그 성격이 그를 패배자로 만든다. 그는 링 안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서 경기에서 승리했지만, 세상 전체를 링으로 만들어서 인생에서 패배한다.
패배한 라모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한국의 챔피언들은 링을 떠난 뒤 요식업계의 사장님이 되거나 동네에 체육관을 열곤 하지만 라모타는 다르다. 처참한 패배 이후 복싱계를 영원히 떠난 라모타는 배불뚝이 스탠딩 코미디언이 된다.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는 라모타를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엄청나게 줄였다가 늘린 것으로 유명하다. 스코세이지는 왜 동일 인물에게 복서와 코미디언이라는 일견 상반된 역할을 맡긴 것일까?
복싱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이제 사람들을 좀 웃겨보고자 코미디언이 된 것일까? 삶에 지친 나머지 이제는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서 코미디언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주먹을 휘두르냐, 말을 휘두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복싱과 코미디는 모두 자멸의 스펙터클이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두들겨 패서 남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복싱과 코미디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아메리칸 드림이건 코리안 드림이건, 관제 성공담 따위로는 아무도 웃길 수 없다. 마침내 선진국의 꿈을 이루었다는 21세기 한국, 여전히 세상의 성공을 믿지 않는 코미디언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도 자기만의 실패담을 가지고 옥상에 오른다. 실패했지만 뛰어내리지 않는 사람만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실패를 가지고 남을 웃길 수 있다. 모든 심오한 코미디는 ‘스탠딩’ 코미디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