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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진 기자의 국방이야기]이런 조직에선 누구나 공범이 될 수 있다

입력 | 2021-06-22 03:00:00


서욱 국방부 장관(오른쪽) 등 군 수뇌부가 성추행 피해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신규진 기자

피해자의 생생한 진술이 있었다. 이를 입증할 증거물도 있다고 했다. 어렵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며 조사를 미뤄 달라는 가해자 요청도 받아줬다.

문제는 모든 혐의를 인정할 줄 알았던 가해자가 일부를 부인하면서 커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 신고 2주 뒤에야 황급히 성추행이 벌어진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피해자로부터 제출받은 20전투비행단 군사경찰 얘기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 중사 사망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3주가 지났다. 국방부 합동수사단의 수사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순 없지만 이번 사건을 지켜본 일부 군 관계자들은 군 수사, 보고체계의 총체적 부실이 조직 내 스며든 ‘관행’ 탓이 크다고 말한다.

성추행 가해자인 장모 중사와 2차 가해를 한 노모 상사, 노모 준위 등 사건의 직접적인 관계자들이 구속됐다. 그런데 수사, 보고라인에 있었던 당사자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기자에게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도도 없었고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논리였다. 사건 신고 닷새 뒤 가해자에 대한 ‘불구속 의견’을 달아 공군본부에 보고한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민간에서 성추행 사건을 다룰 때 구속 수사를 하는지 알아보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군의 수사, 보고 및 조치가 조금이라도 더 피해자를 생각했다면 이 중사를 살릴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20비행단 군사경찰은 사건 발생 15일 뒤에야 가해자를 조사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군 검찰은 50여 일간 가해자와 피해자 조사를 미뤘다. 피해자를 보호하라고 만들어진 공군본부 양성평등센터는 사건 초기 이 중사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도 한 달 뒤에야 이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27년간 여성정책 분야에 종사했다던 센터장은 ‘늑장 보고’ 경위에 대해 “지침을 숙지하지 못했다”는 황당한 변명을 내놨다.

‘주요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중사 사건은 지휘라인을 타고 사건 발생 43일 만에 공군참모총장에게 ‘보고만’ 됐다. 이 중사가 2차 가해에 시달릴 동안 여타 사건들처럼 이 사건은 지휘부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국선변호사(법무관)에게 전달된 이 중사 부친의 탄원서는 한 달 뒤에야 군 검찰에 전달됐다고 한다. 딸의 상태가 걱정되고 2차 가해가 이뤄지고 있다는 부친의 절절한 호소문을 봤다면 이 정도로 수사가 지연됐을까. 한 법무관은 “부끄럽지만 피해자 탄원서는 보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사망 2주 전까지도 이 중사는 민간 변호사를 선임하자는 남자친구에게 “사선변호사를 선임하면 경제적 부담이 크다”며 군의 피해자 조력 시스템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그는 피해자 진술에서 성추행을 당할 당시 “‘이 상황이 더럽지만 참는다. 군대니까 누구한테 이야기 안 하고 참고 해프닝으로 넘기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해자를 비롯한 상관들의 온갖 회유를 뚫고 용기를 내 신고했지만 그가 마주한 건 피해자에 대한 조직의 무관심이었다. ‘루틴’한 늑장, 부실 수사·보고 속에서 이 중사는 수년간 몸담았던 군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신을 가슴속에 키웠을 것이다.

반복되는 업무 속에 스며든 관행은 사태의 경중을 파악하고 기민해야 할 유연성마저 삼켜버렸다.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 비극적 결말은 이런 관행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 버린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중사 사건과 별개로 4월 대전지방법원은 7개월 동안 19일밖에 출근하지 않고 무단결근, 허위출장 등을 일삼은 공군 법무관의 해임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법무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강이 해이했던 사정도 비위 행위가 장기화하는 데 영향을 미쳐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 군 내부에서조차 “웃지 못할 판결”이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왔다.

이 중사 사건에 대한 총체적 재수사에 나선 군 당국 대신 “민간에서 수사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이면엔 군이 변하지 않을 거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사건 초기 참모총장을 자르고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민관군 합동기구를 만들겠다는 현 조치들이 2014년 윤모 일병 사건 당시와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4년 윤 일병 사건과 2021년 이 중사 사건을 수개월 뒤에야 처음 인지한 국방장관들은 모두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로 보인다”는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의 지적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런 조직에선 의도치 않아도 누구나 공범이 될 수 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