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룡이 설계한 민병옥 가옥.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에 넣고 긴 복도로 이은 평면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양식을 제안하는 시도였다. 임형남 대표 제공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사실 예전엔 우리의 전통 주거양식을 한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집을 이르는 단어를 찾아보면 가사(家舍), 제택(第宅), 민가(民家) 등이 쓰였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주택(住宅)이라는 말도 없었다. ‘주택’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옥’도 집의 양식상 구분이 필요하던 시절이 되면서, 즉 외부 문화가 갑자기 태풍에 떠밀린 커다란 파도가 덮치듯 밀려 올 때 생긴 용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 무렵에, 서양인이 직접 가지고 들어왔거나 혹은 일본이나 중국인들을 통해 우회 수입되었던 서양 문물들 앞에 ‘양(洋)’자를 붙여서 구분했다. 서양의 음식은 양식(洋食), 의복은 양복(洋服), 버선은 양말(洋襪) 그리고 서양의 집은 양옥…. 그러고 보면 한옥이라는 단어는 그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우리나라 주거양식의 어떤 느낌도 특질도 들어 있지 않은, 그냥 서류 갈피에 붙어 있는 이름표처럼 무덤덤하기도 하고 무성의하기도 한 이름이다.
그러다 시대가 바뀌며 반대로 한옥은 모두 선망하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한옥이란 대체 어떤 집일까. 나무 기둥과 대들보와 도리와 서까래로 뼈대를 짜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집? 정서나 건강에 좋은 집? 사실 한옥을 하나의 유형이나 어떤 특정 시절의 집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한옥은 늘 성장하고 변화해 왔다.
가장 큰 변혁은 193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 박길룡(朴吉龍·1898∼1943)은 앞선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시인 이상이 건축가 김해경으로 일을 하던 시절, 그의 선임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근대식 빌딩을 설계했는데, 화신 백화점, 대학로 공업전습소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의 2000년대 초반 모습. 분할된 필지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한옥들이 들어섰다. 임형남 대표 제공
동향의 대문을 들어서면 ‘H자’형 본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청을 한 칸 규모로 축소하고 별도의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긴 복도로 이은 평면은 전통 주거에는 없던 구성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양식을 제안하고자 한 시도로써, 개량한옥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박길룡은 이후에도 주거에 대한 문화·개량·위생운동을 벌였다.
북촌한옥마을의 주요 골목인 가회동 31번지는 원래 민대식 소유의 땅이었다가 분할된 필지들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한옥들이 들어서며 조성됐다. 이렇듯 한옥이란 오래도록 하나의 전형으로 고정되어 온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나 기호에 따라 진화하고 개량되며 계속 몸을 바꾸어 왔다.
간혹 영화나 인터넷을 보다 30, 40년 전 서울 사람들의 말투를 들어보면 지금과 무척 달라 놀라게 된다. 얼마 전 우리가 경험했던 시대인데도 그렇다. 말투가 계속 변하듯 집도 계속 변화한다. 간혹 한옥은 이래야 한다며 엄한 기준을 들이대는 사람도 있지만, 그 본질은 한국인이 구하기 용이한 재료로 한국의 기후에 맞게 개량하고 발전시킨 주거라는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