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6·25전쟁과 관련한 두 가지 역사적인 날짜가 다가온다. 첫째는 1950년 6월 25일 개전일이다. 두 번째는 소련이 유엔 주재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를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한 날인 1951년 6월 23일이었다. 종전까지는 2년이나 남은 시점이었지만, 1951년 6월 23일까지 1년 동안 전황은 그야말로 반전과 반전이었다. 6월 25일 북한군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8월에는 낙동강 전선으로 축소되었다. 이것도 원래 북한군 계획대로면 벌써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났어야 했다. 개전 당시 소련군 지휘관들은 북한군의 능력이 우수하고, 진격 속도가 빠르다고 극찬했었다.
유엔군 참전 결의로 전황은 북한의 예측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11월에는 거꾸로 유엔군이 압록강-두만강 라인까지 진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중공군이 참전하며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궤멸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 중공군의 규모와 전술은 연합군에겐 너무 낯선 것이었다. 대응책을 찾지 못하면서 전선은 다시 중부 지역까지 밀렸다.
그러나 1951년 2월부터 연합군은 다시 반격 태세로 돌아섰다. 이쯤에서 중공군 야전사령관들은 기습의 효과가 끝났고, 전쟁에 승리를 거둘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야전군의 제안을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소련과 중공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서 휴전 제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젠 전쟁 중에 태어나고 자라난 세대도 노인이 되었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묻힌다. 그러나 이념의 갈등은 더 고약하게 변해 간다. 현실의 갈등,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모순은 얄팍한 지식인의 현학이 되고, 이념과 정치의 장난감이 되어 간다. 역사에 대한 진실한 성찰은 이렇게 멀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