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미국 뉴욕에서 실제로 발생한 US에어웨이즈 항공기의 허드슨강 불시착 사고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속 한 장면.
지난달 국내 항공사 소속 조종사 4800여 여명이 모인 사단법인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ALPA-K)는 자체적으로 ‘항공사고 대응 핸드북’을 펴냈습니다. 책에는 항공 관련사고 발생시 보고 방법, 도움 요청 등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무 내용과 함께 사고가 났을 때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등에 대한 사고 조사관련 제언도 담겨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목록을 살펴보면 △사고가 났을 때 조종사가 보고, 지원 요청, 기록, 초기 진술, 언론 대응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사고 조종사 대응 지침’ △조종사 개인이 아닌 조종사협회 차원에서 어떤 지원을 하고 또 어떻게 조종사와 그의 가족, 언론 대응을 지원할지의 내용을 담은 ‘조종사협회 대응지침’ 등을 담겨있습니다. 김규왕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 회장은 “항공 사고 조사 및 대응 체계가 선진국보다 미흡한 게 현실”이라며 “사고 대응 수준이 높이지면 사고를 예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핸드북 발간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핸드북을 직접 펴낸 배경은?
조종사들이 직접 핸드북을 펴낸 배경에는 조종사들의 말 못할 속사정이 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항공사별 지침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랐습니다.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가 발간한 항공(준)사고 대응 핸드북 표지.
항공 관련 사고가 나면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조사를 합니다. 문제는 조사위원회에 현직 기장 또는 조종사 협회, 사고 당사자의 참여가 제한돼 있다는 겁니다. 항공사고의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서 사고 당사자와 이해 집단으로 분류된 조종사 등을 배제한 건데요. 이것이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현장의 반응은 다릅니다.
항공사고를 조사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되는 항공기 블랙박스. 우리나라는 항공사고가 발생하면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조사를 담당합니다.
제대로 된 사고 원인 조사 및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최대만 많은 기장들의 목소리와 사고 당사자의 진솔한 의견이 최대한 반영 돼야 한다”는 것이 조종사들의 주장입니다. 특히 크고 작은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본 조종사들은 “사고 조사를 형사처벌을 위한 수사처럼 한다. 정작 사고 분석과 예방을 위한 조사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즉, 사고 조사 및 언론 보도 등이 책임자 처벌 및 귀책사유 찾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보니, 사고 당사자들이 오히려 처벌을 피하려고 말을 아끼거나 회피를 한다는 것이죠.
●사고 조사의 표본 ‘허드슨 강의 기적’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US에어웨이즈 1549 편’ 비상착륙 사고를 잘 아실 겁니다. 탑승객 155명을 태운 항공기가 새 충돌(버드 스트라이크)를 당하면서 엔진이 꺼졌고, 허드슨 강에 비상 착륙을 해 탑승객 모두 생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항공사고 조사 및 대응에 관해 업계의 바이블(표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영화에서도 잘 묘사돼 있지만, 당시 항공기를 조종한 설리 기장이 사고 청문회에서 자기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풀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설리 기장은 항공기 비상대응 매뉴얼에 적혀 있는 절차 일부의 순서를 바꿔, 자기의 순간적인 판단과 경험에 비춰 즉흥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2009년 미국 뉴욕에서 실제로 발생한 US에어웨이즈 항공기의 허드슨강 불시착 사고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포스터.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런 임기응변이 사람들을 모두 구하는 결과로 이어졌죠. 당시 미국 정부와 여론 등은 설리 기장이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규정을 지키지 않은 조종사의 이유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설리 기장에게 왜 규정을 안 지켰는지 따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극적인 요소를 조금 반영한 ‘영화적 연출’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당시 설리 기장의 판단이 사람을 모두 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판단을 반면교사 삼아 오히려 관련 항공 규정을 바꿔 버리죠.
만약 당시에 설리 기장을 처벌하고 그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나무랐다면, 설리 기장은 아마 제대로 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사람을 살렸으니 앞으로는 규정대로 하라는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건설적인 규정 변화가 없었을 겁니다. 같은 사고 상황에서 오히려 현실에 맞지 않는 규정을 따르다 더 큰 사고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핸드북이 세상에 나온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사고 및 조사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서 진상 규명과 함께 사고 방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책에서는 조종사협회가 사고 조사 위원회에 들어가서 사고 조사에 참여를 하고, 정말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 앞으로 이런 사고가 재발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조종사의 전문적 시각으로 한 번 더 보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원인에 귀를 기울여라
책의 초반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사고조사 체계가 바로 사고 예방으로 대표되는 안전관리 업무의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항공 사고는 과거 대비 비약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항공사고는 과거 대비 현저히 낮은 사고율에도 불구하고, 인적 요인에 의한 사고 비율이 여전히 높다고 합니다. 조종사의 피로, 과중한 업무 부하, 착각, 오인,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장비 또는 시스템 결함에 의한 사고라고 분류된 경우에도 조종사의 조치가 부적절 했거나 모호한 지시 및 원활하지 않은 소통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적도 있습니다.
국가별 항공 사고조사 시스템은 수준이 각기 다릅니다. 어느 나라 것이 좋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운항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현직 조종사의 참여가 어느 정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조종사협회의 주장입니다. 미국에서는 사고 조종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현직 조종사의 의견이 사고 원인을 찾는데 귀한 단서가 된 적도 있습니다. 이에 미국은 조종사 참여의 긍정적인 효과를 반영해 협회나 노동조합 등 조종사 단체를 공식적으로 조사 과정에 참여 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 소속 조사관이 항공사고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미국은 항공사고 조사 과정에서 조종사의 참여와 의견 개진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flickr.com
반면, 우리나라는 조종사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조사에 방해가 될 수 있고, 처벌과 책임을 강하게 부여해야만 항공사고가 줄어든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호주나 아일랜드 등 일부 국가들도 조종사들의 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나라들은 정부와 일종의 업무협약을 통해서 조종사들의 사고 조사 참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핸드북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고조사 전문가에게 현직 조종사 단체의 사고조차 참여 제도의 필요성과, 그들의 참여가 사고 조사의 공정성, 객관성을 훼손하다는 논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항공 사고 조사분야의 전문가인데 왜 그들을 사고 조종사의 이익에 관련된 집단으로 간주하고 참여를 배척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답한다”
그 동안 어쩌면 우리는 다양한 항공 사고를 겪으면서 “누가 잘못을 했느냐”에만 집중했는지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쳤던 부분이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놓친 부분이 또 다른 사고로 되돌아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양한 전문적인 시각으로 ‘무엇이 문제였을까?’ 에 대한 성역 없는 논의를 해보는 것이 또 다른 사고를 막는 가장 기본일 것입니다. 항공 사고 대응 핸드북은 http://alpak.or.kr 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