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타입의 최종 생산형에 가까운 1974년형 로드스터. E-타입은 14년 간 7만2000여 대가 생산되었다. 재규어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타입은 재규어에 의미가 큰 모델이다. 13년 동안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며 브랜드의 고성능 이미지를 굳힌 XK 시리즈의 역할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가속력과 제동력, 세련되면서도 민첩한 핸들링 등 스포츠카가 갖춰야 할 자질들을 이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보여줘야 했다. 개발자 윌리엄 헤인즈와 맬컴 세이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E-타입을 개발했다.
1961년 E-타입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재규어 총수 윌리엄 라이온스 경. 재규어 제공
E-타입은 데뷔 당시에 직렬 6기통 3.8L 엔진을 얹었다. 이 엔진은 앞서 재규어가 르망 24시간을 비롯해 여러 경주에 내보내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D-타입 등의 경주차에 썼던 적이 있다. 이 엔진에 쓰인 DOHC(흡기와 배기 밸브를 제어하는 캠샤프트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구조) 밸브계는 당시만 해도 재규어 이외에는 극소수의 고성능 차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재규어를 대표하는 스포츠카 E-타입이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기념으로 특별히 한정 복원한 E-타입 60 컬렉션.
스포츠카는 빠른 가속만큼 정확한 제동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재규어는 E-타입의 네 바퀴에 모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달았다. 당시 유명했던 스포츠카들도 모든 바퀴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단 차는 드물었다. 특히 뒷바퀴용 브레이크는 차의 운동 특성을 좋게 만들기 위해 바퀴가 아니라 구동축 안쪽에 설치했다. 이른바 인보드 방식 브레이크 배치였다. 이와 같은 브레이크 배치는 이미 이전 모델인 XK150에도 쓰였을 만큼, 재규어는 기술 면에서 선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E-타입 쿠페의 실내. 질감이 살아있는 목재 스티어링 휠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많은 애호가가 최고의 E-타입으로 꼽는 차는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생산된 시리즈 1이다. 맬컴 세이어의 오리지널 디자인이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구현됐기 때문이다. 차체는 2인승 쿠페와 간이형 뒷좌석을 갖춘 2+2 쿠페, 2인승 로드스터(컨버터블) 세 가지였는데, 모두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차체 비례가 비슷한 동시대 이탈리아나 프랑스, 독일 스포츠카들과는 사뭇 다른 E-타입만의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옛 차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와이어 휠.
데뷔 직후에도 E-타입의 매력은 많은 이를 사로잡았고, 유명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조지 해리슨을 비롯한 가수들, 피터 셀러스, 토니 커티스 등 배우들, 포뮬러 원(F1) 챔피언을 차지했던 영국 자동차 경주 선수 재키 스튜어트 경 등도 E-타입을 소유했다. 14년간 7만2000여 대가 생산된 E-타입은 이제 많은 사람이 갖고 싶어하는 클래식카의 반열에 올랐다. 클래식카 경매에서도 꾸준히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미국 몬테레이에서 2018년 RM 소더비 주관으로 열린 경매에서는 1961년형 시리즈 1 쿠페가 72만 달러(약 8억 원)에 낙찰되었고, 지난해에는 재규어가 복원한 1963년형 라이트웨이트 E-타입이 미국 엘커트 컬렉션 경매에서 171만 달러(약 19억 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E-타입은 재규어의 황금기에 가장 화려하게 빛난 모델이면서, 재규어 역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큰 모델이기도 하다. 이후 재규어는 E-타입의 혈통을 잇는 정통 스포츠카를 꾸준히 만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E-타입만큼 혁신적이거나 매력적이지 못했다. 럭셔리 카로 봐도 손색없는 클래식카로 자리잡은 E-타입과 달리 지금의 재규어를 럭셔리 브랜드로 취급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E-타입과 같은 걸작을 꾸준히 내놓지 못한 데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