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망칠 때 가장 용감한 얼굴이 된다/윤을 지음/256쪽·1만5800원·클레이하우스
주식투자 유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장기투자와 단기투자. 속된 말로 손해를 봐도 끝까지 버티는 ‘존버’와 이익이 나지 않으면 빨리 팔아버리는 ‘손절’이다. 주식에 정답은 없다. 비싼 가격에 샀지만 버티다 결국 수익을 낼 수도 있고, 손해를 받아들이고 포기한 뒤 다른 종목에서 더 큰 수익을 낼 수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에도 두 가지가 있다. 버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우리 사회는 버티는 데 더 큰 점수를 부여한다. 인내는 미덕이지만 중도에 탈출하는 건 나약함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반대로 말한다. 도망은 비겁하거나 연약한 게 아니라 용감한 행위라고 말이다.
저자는 도망이 포기와 다르다고 말한다. 포기가 방향을 잃고 주저앉는 것이라면, 도망은 지금까지 왔던 길에서 방향을 트는 행위다. 저자가 얘기하는 도망이란 ‘죽기 살기로 도망친다’고 표현할 때의 그 도망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문학이 상투성과의 싸움이고, 철학이 기존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시도한 도망에 관한 재해석은 문학이며 철학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자신이 도망친 결과가 전반적으로 괜찮았다고 평한다.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삶과 세상은 늘 변하고 뒤늦게라도 도망치지 않으면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어서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욱 커져 결국 감당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제안한다. 우리 모두 기꺼이 도망자가 되자고.
좋은 에세이가 그렇듯 훔치고 싶은 명문장이 많다.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진짜 대상은 특정한 사람이나 회사 혹은 상황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의식일 때가 더 많다’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잘 도망치기 위해 필요한 건 명분이고, 그 명분은 나의 존엄성과 직결된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12년 차 출판 편집자답게 문학 철학 역사를 넘나들며 다양한 저자와 작품을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도망이 성공하려면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윤리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돈에 관한 철학을 밝힌다. 나를 자립하게 해주고 누군가에게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쳐야지 돈 자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것. 존엄성이 무너진다는 건 현명하게 도망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손민규 예스24 인문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