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1600점 이상 대거 쏟아져나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와 1440년대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포함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종 시대 과학유산의 부품들도 함께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해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 580여 점과 한자 금속활자 1000여 점을 공개했다.
한자 금속활자 중 최소 6개는 1434년에 만든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나온 한자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현종실록(1677년) 인쇄에 쓰인 것이었다. 갑인자 추정 활자가 추후 연구를 통해 최종 확인된다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최초 실물이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앞선 것이 된다.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열린 서울 공평동 유적 출토 중요유물 언론공개회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등이 공개되고 있다. 2021.6.29/뉴스1 © News1
이번 발견은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 수준의 금속활자를 발견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은 갑인자 추정 활자를 두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40여 종 가운데 기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다”며 “세종, 세조 시대 문화 황금기를 이끈 데 영향이 컸던 조선 활자 인쇄술 규명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동국정운식 표기가 실물 활자로 확인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 ‘ㅱ, ㅸ, ㆆ, ㆅ’ 등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본으로는 여러 책이 있지만 활자로는 전해진 것이 없었다. 백두현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현재 실물 한글 금속활자 중에는 ㅱ, ㆆ, ㆅ 글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글자는 1480년대까지만 사용됐기 때문에 이번에 나온 한글 활자가 확실히 가장 오래됐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은 수도문물연구원이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종로구 인사동 79번지)’ 발굴조사 중에 이뤄졌다. 이곳은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였다.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출토지역에 관한 조선 전·후기 기록을 찾아본 결과 관(官)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다”며 “건물터 형태를 보면 양반도 살았겠지만 시장에서 살았던 중인, 관악의 아속들이 주로 거주했던 집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금속활자는 해당 장소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에 있는 도기 항아리 안에서 발견됐다. 항아리에는 주전(籌箭·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 물시계의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속품)도 함께 있었다. 문화재청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도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귀한 유물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이 곳에 대거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화재청 및 수도문물연구원의 입장이다. 발굴 유물 중에 15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승자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각종 동제 유물 출토에 대해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성분분석 전이지만 색깔을 봤을 때 순동에 가깝다”며 “조선시대에 동 자체가 귀한 재료라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군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고 나중에 녹여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이 곳에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