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쌍둥이 반대 팬도, 아이돌 팬덤도…트럭 시위 유행 김은영 “정의나 공정, 이제 연예·스포츠 인사들에게도 요구” 하재근 “회사 이미지와 직결되기에 팬들 목소리 무시 못해” 박진규 “팬덤 내 충분한 토론을 거친 결과인지 살펴봐야”
“뭐? 칼 들고 협박하던 학폭 가해자가 배구판에 복귀한다고!”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소속이었던 이재영·이다영(25) 쌍둥이 자매의 복귀를 반대하는 문구를 스크린에 띄운 트럭이 흥국생명 본사가 있는 서울 종로구와 한국배구연맹이 있는 마포구 일대를 배회했다.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돼 무기한 출전정지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은 두 선수가 징계 4개월 만에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팬들이 두 자매와 흥국생명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지난달 28일부터 30일까지 ‘트럭 시위’를 한 것이다.
블링크는 이후에도 멤버 지수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에도 소속사의 홍보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멤버 제니를 향한 사생활 침해·악성 루머 등에 대한 법적 조치를 요구하는 트럭 시위를 각각 진행하기도 했다.
YG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트럭 시위를 벌인 블랙핑크 팬클럽 블링크. 트위터 갈무리
2020년 9월에는 걸그룹 트와이스 팬클럽 ‘원스’가 JYP엔터테인먼트로 뮤직비디오 제작사 교체를 요구하는 트럭을 보냈다. 같은 제작사와 오래 작업하다 보니 신선함와 창의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악플러에 대한 지속적인 고소·고발과 그 결과를 공지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방탄소년단(BTS) 팬클럽 ‘아미’도 같은 해 12월 하이브(빅히트)를 상대로 트럭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하이브가 레이블 소속 가수들의 첫 합동 콘서트 개최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아미는 ‘주가 상승을 노린 소속사의 언론플레이용 공연’이라면서 반발했다.
왼쪽부터 JYP엔터테인먼트, 하이브(빅히트)를 상대로 트럭 시위를 벌인 트와이스 팬클럽 원스와 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 트위터 갈무리
최근에는 걸그룹 아이즈원 팬클럽 ‘위즈원’이 해체 반대 트럭 시위에 나섰고, 이승기 팬덤 ‘아이렌’은 이승기 자택 앞 트럭 시위를 통해 배우 이다인과의 열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뿔난 팬들의 트럭 시위는 연예계뿐 아니라 게임 업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올해 2월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 유저들은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항의 문구가 담긴 트럭이 넥슨 본사와 국회 앞을 순회하도록 했다. 넷마블 게임 ‘세븐나이츠2’ 유저들도 이용자의 편의성 개선을 위한 업데이트를 촉구하며 트럭 시위를 벌였다.
넥슨을 상대로 트럭 시위를 벌인 메이플스토리 유저들. 트위터 갈무리
팬들이 의견을 표명하는 새로운 소통 창구로 트럭 시위가 자리 잡은 것이다. 팬(Fan)과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인 ‘팬슈머(Fansumer)’라는 용어가 생겼을 정도로 팬은 단순 응원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를 넘어 소비하는 대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주체가 됐다.
팬들은 트럭 시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의 안전한 의견 표출 수단인 데다, 언론 보도를 통한 파급력이 높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또 해당 날짜에 참석 가능한 소수의 사람만 모여 진행했던 기존 시위와 달리 ‘모금’만으로 참여할 수 있어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트럭 시위를 선호한다.
물론 팬덤 내에서 트럭 시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트럭 시위가 항상 팬덤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의 목소리일지라도, 의사를 전달하려는 팬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소통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예나 지금이나 팬들은 항상 소속사 등을 향해 목소리를 내왔다”며 “다만 팬카페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쓰는 건 이슈가 잘 안됐을 뿐이다. 트럭 시위는 언론에서 다루니까 팬들이 파급력이 크다고 느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속사나 구단, 게임사 등 업체 입장에서는 트럭 시위가 회사의 이미지, 신뢰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팬들의 이러한 목소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소비자들이 트럭 시위를 통해 업체 측을 견제할 만한 힘을 갖게 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과연 시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팬덤 내 충분한 토론이 이뤄졌는지는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목소리 큰 소수의 의견이 팬덤 전체를 대변하는 유일한 목소리인 것처럼 비춰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