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면/이마에 주름살,/자고나면/뜨락에 흰 라일락./오지랖이 환해/다들 넓은 오지랖/어쩌자고 환한가./눈이 부셔/눈을 못 뜨겠네./구석진 나무그늘 밑/꾸물거리는 작은 벌레./이날 이적지/빛을 등진 채/빌붙고 살아 부끄럽네./자고나면/몰라볼 이승,/자고나면/휘드린 흰 라일락.
―김상옥(1920∼2004)
시인들은 때로 시작 노트라는 것을 쓴다. 신작시를 발표할 때, 시를 쓸 때의 마음이라든가 작품 해설을 짧게 붙인 것을 말한다. 사실 시작 노트는 흔하지 않다. 대개의 시인들은 설명을 삼간다. 시는 시 그대로, 읽는 이의 마음으로 날아가 살아야 한다. 거기에 시인의 해설을 얹으면 시는 무거워져 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의 모든 시작 노트를 좋아한다. 그건 마치 자기 시의 셀프 뒷담화 같다. 게다가 시인들은 시작 노트도 잘 쓴다. 산문이어도 시 같은 산문일 때가 많다. 시보다 정보도 더 많이, 명확하게 담겨 있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이건 세상의 주류와는 반대되는 말이다. 돈보다 귀한 것이 있다니, 이런 주장은 잊혀진 철학이며 변방에나 떠돌 신념이다. 그러나 잊혀졌다고 해서 잊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고상한 그의 자존심, 마이너가 된 다짐을 신뢰한다. 시인은 자고 나면 주름살이 느는 세상살이에서 덜 부끄럽게 살자고 말한다. 삼 일을 못 갈 다짐이래도, 한번 따라해 볼까. 지금은 햇살이 눈부신 계절이니까.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