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히스토리/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536쪽·2만8000원·책과함께
폭발로 지붕이 사라진 원자로는 연기를 내뿜고 그 주변을 방호복을 입은 경찰, 소방관, 군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닌다. 누출된 방사능이 부유하는 도시엔 주말을 맞아 거리를 거닐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연인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이들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1986년 4월 26일, 불과 3.5km 떨어져 있는 두 곳의 모습이다. 이 사고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당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폭발한 원자로에서 500km도 안 되는 곳에 거주하던 저자가 사고의 원인과 결과, 교훈을 다룬 역사서다. 역사학자로서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으로 원자로 설계 결함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당시 소련 공산당의 기조를 꼬집는다.
사고의 생존자이자 증인인 저자는 소련 정부가 필사적으로 사고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과정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소련 정부는 공황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주민 대피를 늦추고, 공산당의 통제력을 해외에 과시하기 위해 노동절 축하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원전 폭발 18일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사고 발생을 인정했다.
“우리가 이미 일어난 재앙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새로운 체르노빌식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난의 종류는 다르지만 세계는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례 없는 팬데믹을 겪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의 대처와 코로나19 발병 초기 감염병을 은폐하려 했던 중국의 조치가 겹쳐 보인다. 정보 은폐가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현 시점에서도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