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日의존 낮춘 한국 반도체 승승장구… 韓日 외교는 여전히 싸늘[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1-07-03 03:00:00

일본의 對韓 수출규제 2년
수출규제 역풍 맞은 日 기업들
계속되는 한일 정부 줄다리기




《2019년 7월 1일 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 경제산업성 회의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한일 양국 취재진 20여 명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경제산업성 측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운용 개정’이란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반도체 제조의 필수 부품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화학물질을 한국에 수출할 때마다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갑자기 발표했다. 전략물자 수출 시 수출 허가 신청을 면제해 주는 나라(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다고도 했다.

일본이 전격적으로 사실상의 ‘경제 전쟁’을 선포하자 한국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의 수출규제를 제소했다. 국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 일본 여행 가지 않기 등의 운동을 벌였다. 이후 양국은 강제징용, 위안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 도쿄 올림픽 지도 내 독도 표기 등을 두고도 사사건건 대립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2019년 12월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규제만 일부 완화됐다. 당시 일본은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는 일본 기업이 반복적으로 거래하는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모든 수출 때마다 일일이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수출 규제가 완전히 풀리기까지는 요원한 분위기다. 2년이 흐른 지금 양국 관계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 양국의 손익계산서

지난달 29일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일본 대표기업 스텔라케미파에 전화를 했다. 홍보 담당자는 “구체적인 양과 금액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 수출이 크게 줄었다. 일본 국내, 한국 이외 국가에 수출을 늘리고 있지만 한국 수출 감소 물량을 회복할 만큼은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이 그동안 불화수소 국산화를 활발하게 하고 있어 (수출규제 전인) 2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국 반도체 관련 소재기업들이 국산화를 정착시키기 시작했다”며 특히 불화수소 대기업인 스텔라케미파와 모리타화학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두 회사의 한국 수출 감소는 연간 60억 엔(약 610억 원) 정도다. 특히 스텔라케미파는 2019 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에 불화수소 수출량이 26% 줄었다. 2020 회계연도에도 수출 감소가 계속됐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충격을 주기 위해 수출 규제를 단행한 일본 정부의 당초 의도와 달리 정작 일본 기업이 피해를 입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일부 일본 기업은 한국에 생산능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매출 감소를 이겨내고 있다. 한국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국 기업에 수출할 때는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포토레지스트 생산업체인 도쿄오카공업(세계 시장점유율 25%)은 수출규제 조치 이후 인천 송도의 기존 공장에 수십억 엔을 추가 투자했다. 최근 생산능력을 2018년의 2배로 늘렸다. 한국 내 반도체 제조용 가스 시장의 28%를 점유한 다이킨공업 또한 충남 당진에 3만4000m² 규모의 반도체 제조용 가스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두 기업 모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반도체 재료를 공급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피해는 어떨까. 수출 규제가 처음 발표됐을 때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이 멈출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 SK머티리얼즈, 솔브레인 등 국내 기업은 불화수소 국산화에 당당히 성공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불화수소 대일 수입액은 2018년 6686만 달러(약 750억 원)에서 지난해 938만 달러로 2년 사이 약 86% 줄었다. 불화수소 수입 중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9년 32.2%에서 지난해 12.8%로 19.4%포인트 낮아졌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유럽 공급처로부터 포토레지스트 수입을 늘렸고, 미국 듀폰으로부터 국내 투자를 유치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양산 중이고, SKC 역시 관련 자체 기술을 확보했다.

산업부는 1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강화 2년 성과’ 자료에서 “100대 핵심 품목의 대일 의존도가 최근 2년 사이 31.4%에서 24.9%로 줄었다”며 “소부장 산업 전체에서도 일본 의존도는 16.8%에서 15.9%로 0.9%포인트 하락했다”고 밝혔다. 한국 재계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볼 때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생산 차질은 없었다”고 했다.

○ 아베 주도, 이마이 지휘, 스가 묵인

2년 전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는 ‘007’ 같은 첩보 공작원의 비밀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 정도 파장이 있는 중요 사안은 통상 사전에 외교 루트를 통해 상대국에 설명하기 마련이지만 한국은 전혀 몰랐고 일본에서도 경제산업성을 제외하고 다른 부서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이 도쿄 주재 한국 특파원단을 통해 일본의 발표 자료를 받아 봤을 정도였다.

일본은 왜 이렇게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일까. 핵심 이유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불만이 꼽힌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징용 배상이 완전히 끝났다는 기존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 와중에 문재인 정권 출범 후 한국 법원이 일본의 이 주장을 뒤집자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의미다. 경제산업성은 2019년 규제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양국 정부와 외교 소식통의 취재를 종합하면, 일본은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범정부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했고, 그중에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인데,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소재가 없으면 반도체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의 의지가 강했고, 그의 최측근이자 경산성 출신인 이마이 다카야(今井尙哉) 비서관이 수출규제 작업을 총괄 지휘했다. 그렇다면 당시 행정부 2인자인 관방장관으로 재직했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현 총리의 판단은 어땠을까.

당시 일본 정부 차원의 한국 대응책 모집에 관여했던 고위 당국자는 기자에게 “스가 관방장관은 핵심 의사 결정 라인에서 비켜나 있었다. 따라서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묵인했다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라고 전했다.

○ 위안부·징용 충돌은 여전
일본은 올해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법원의 판결에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국제법상 특정 국가는 다른 나라의 재판권 아래 놓이지 않고, 한일 간 청구권 문제는 1965년 청구권·경제협력협정으로 해결됐으며, 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해결됐다는 것이다.

한국 측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 측은 “한국이 해법을 가져와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스가 총리는 징용과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과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6월 초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스가 총리에게 2, 3차례 다가가 인사를 건넸지만 스가 총리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

당장 양국이 전면전으로 치닫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선거’라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있다.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인 9월경 중의원 해산 및 총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스가 총리와 문재인 정권 모두 외교보다 재집권에 치중해야 할 필요성이 큰 셈이다.

선거 때면 양국 정치인들은 일상적으로 상대국을 공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권 대권주자들은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하자 ‘올림픽 불참’을 언급하며 강하게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일본 집권 자민당 소속의 지한파 정치인은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과 정치를 연결시키느냐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민당 내에서도 “문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일 관계가 개선된다” “일본의 안보 파트너는 한국이 아니라 대만”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금이야말로 한일 모두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서로를 미중 전략경쟁의 파트너로 인식해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민간 교류에서 찾는 희망
다만 양국의 정치, 외교 갈등이 여전해도 문화를 중심으로 한 민간 교류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후 도쿄 시부야의 대형 서점 겸 음반점 ‘쓰타야’. 매장 한복판에 설치된 그룹 ‘방탄소년단’의 일본어 베스트 앨범 앞에서 팬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계산대 위 대형 화면에도 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6월 중순 일본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단 한 주 만에 78만 장이 팔려 올해 가장 많이 판매된 음반이 됐다. 방탄소년단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공신력 있는 음악 차트인 ‘오리콘’의 6월 둘째 주 앨범 차트는 방탄소년단(1위)을 비롯해 세븐틴(2위), 엑소(3위), 트와이스(4위) 등 ‘TOP4’를 모두 한국 가수들이 휩쓸었다.

일본 도쿄 신주쿠의 한 케이팝 댄스 학원에서 일본 10, 20대 젊은이들이 한국 대중음악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신주쿠의 K팝 댄스 학원에도 10, 20대 학생들이 몰린다. ‘트와이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고등학생 미호 양(18)은 “한국 아이돌의 춤과 노래가 우리 또래에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어 춤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가 춤꾼이 되겠다고 했다.

일본 중장년층의 한국 드라마 사랑도 여전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전시회가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참석자는 대부분 ‘겨울연가’ 때부터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 중장년층이다. 아사히,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유력 언론도 최근 잇달아 일본 내 한류 콘텐츠의 인기 비결을 특집 기사로 다뤘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오른쪽)은 한국 배우들을 캐스팅해 한국에서 영화 ‘브로커’를 촬영했다. 출연 배우인 배두나와 함께 촬영 현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출처 배두나 인스타그램

2018년 영화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유명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는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등을 캐스팅해 한국에서 한일 합작 영화 ‘브로커’를 촬영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4월 촬영 시작 당시 제작진에 “기획 때부터 한국 배우 3명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무엇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양국 교류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을 강조했다.

도쿄 하라주쿠 내 한국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매장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매년 9월 서울과 도쿄에서 열리는 ‘한일 축제 한마당’ 역시 파행 없이 열리고 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작년에도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외무성 관계자는 “빨리 코로나19가 끝나 양국 국민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양국 정치인과 정부가 못하는 관계 개선을 양국 국민이 해내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