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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패권 시대, 과학기술 혁신전략이 필요하다[동아광장/이성주]

입력 | 2021-07-06 03:00:00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바뀐 기업 전략
점점 커지는 중장기 미래 예측 중요성
구성원 지식-통찰력으로 미래 방향 도출
기업 교류로 한국형 혁신전략 수립해야



이성주 객원논설위원·아주대 산업공학과 교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우리나라가 32번째로 선진국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이전에도 다수 국제기구에서 한국은 이미 선진국으로 분류됐고,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한국이 스스로 선진국을 선언한 바도 있어 UNCTAD의 소식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다만 사회 각 영역에서, 특히 우리나라를 지금의 선진국 위치로 올려놓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과학기술 분야에서 우리가 선진국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몇 년간 기업의 혁신전략 수립에 참여하며 느낀 몇 가지가 있다.

추격자 전략을 통해 성장한 다수 국내 기업은 중장기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눈앞의 성과를 내는 단기 예측 혁신전략을 수립해 왔다. 해외 선진기업과 비교해 자사의 기술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경쟁사 모니터링으로 기술개발 전략을 수립해 왔다. 그러다 보니 체계적인 분석 절차가 혁신전략 수립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돼 왔다. 또 외부와의 협력보다는 내부의 효율성 향상이 우선시됐다.

그러나 최근 과학기술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추격자 전략으로 성공해 왔던 국내 기업들이 선도자 전략을 취함에 따라 중장기 미래를 예측하고 기업의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기업 예측(corporate foresight)’이 혁신전략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1847년 설립되어 170년 이상 생존하며 세계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지멘스는 ‘미래의 그림(Pictures of the Future)’이라는 기업 예측 활동을 수행한다. 즉, 모빌리티, 신재생에너지 등 특정 주제와 관련해 사업의 미래 시나리오, 핵심 동향, 기술 전망을 도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IBM은 매년 ‘5 in 5’라는 이름으로 향후 5년간 우리의 삶을 가장 크게 바꿀 것으로 생각되는 5대 혁신기술을 제시한다. 이런 기업 예측은 지멘스나 IBM의 문화이자 조직 프로세스로 자리 잡았다. 반면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을 여럿 보유한 국내 기업들의 중장기 기업 예측 수준은 이제 걸음마 단계로 볼 수 있다.

기업 예측에 있어 오랜 기간 축적된 내부 전문가들의 지식과 통찰력은 중요한 정보원이 된다. 중장기 미래 예측에 가용 가능한 데이터가 적은 상태로 경쟁사 모니터링을 하는 것은 선도자 전략에서는 큰 시사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IBM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미래 예측가로 활동하길 원하는 조직 문화가 만들어졌다. 지멘스의 성공에는 구성원들의 주인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에서 구성원들은 기업 예측 활동에 다소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내부 인력으로만 이루어진 예측의 결과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듯하다. 실무자들에게는 이런 예측 활동에 참여한다는 게 기존 업무 외에 부가적인 업무로 느껴질 수 있다.

내부 전문가의 역할은 최근 주목받는 애자일(agile) 방식의 미래 예측과 전략 수립에서도 강조된다. 이는 전문가들이 빠르게 미래를 예측하고 전략을 수립한 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그 결과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방식이다. 국내 기업들이 강조해 왔던 기존 접근법에서는 전략 수립에 소요되는 시간이 다소 긴 편이다. 이 경우 전략이 도출되는 순간 이미 그 전략은 과거의 전략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내부 전문가들의 통찰력을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애자일 방식 또한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유럽 기업들은 기술협력이나 사업협력 외에도 경영 기법을 함께 연구하는 협의체를 운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운영하는 STIM(전략기술혁신관리·Strategic Technology & Innovation Management) 컨소시엄에는 프랑스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 스위스 기술기업 ABB, 영국 석유회사 BP, 덴마크 장난감회사 레고 등 기업들이 참여한다. 여기서 서로의 경험과 통찰력을 나누며, 대학을 중심으로 혁신전략 기법에 대한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국내 기업들 또한 이처럼 기업 간 협업을 통해 국내 기업문화에 적합한 혁신전략 수립 기법을 연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경제와 안보가 과학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기술패권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국내 기업들이 과학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 미래의 이정표를 잘 설정할 수 있도록, 선진국다운 혁신전략 수립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있는지 우선 점검해 볼 시점이다. 이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성주 객원논설위원·아주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