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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때문에 가야 파헤친 日[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1-07-06 03:00:00


1978년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왼쪽 사진). 단순함을 살린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 관으로 꼽힌다. 위 사진은 지산동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으로 꼽히는 39호분에서 출토된 환두대도의 일부분. 사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가야의 고도(古都)라 하면 흔히 경남 김해를 떠올린다.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능, 수로왕 탄생 신화가 스며 있는 구지봉, 궁궐터인 봉황대 등 곳곳에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야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존재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였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초기 가야연맹이 5세기 초반 이후 고구려의 침입으로 타격을 입고 신라로 넘어간 후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연맹체를 이뤘다. 대가야는 5세기 이후 가야의 맹주가 돼 국제 무대를 누비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에는 대가야의 위상에 걸맞은 기념물이나 신성한 공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오직 지산동 산정에 무리 지은 거대한 무덤들만이 그 옛날 대가야의 영광을 웅변할 뿐이다. 이 무덤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지만 실체가 드러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 가야 발굴 유물 빼돌린 일제

그 옛날 고령 사람들은 마을 뒷산의 거대한 무덤 하나를 금림왕릉(錦林王陵)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리 기록되었으니, 그 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가야에 관한 역사 기록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대가야에 금림왕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선총독부 외곽 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는 이 무덤을 콕 집어 발굴했다. 당시 지산동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이었고 39호분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발굴 이유는 다름 아닌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용도였다. 일제는 김해나 함안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지 못하자 시선을 고령으로까지 돌렸던 것이다.

무덤에서 황금 장신구와 금동제 화살통 부속구, 용과 봉황 장식이 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화려한 유물이 쏟아졌다. 당시 기록에는 발굴 유물을 조선총독부로 보냈다고 적혀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은 화살통 부속구와 환두대도에 불과해 다른 유물의 소재는 알 길이 없다. 조선고적연구회 발굴품 가운데 학술연구 목적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으로 반출된 사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무덤 출토품 또한 그리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자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등은 2002년에 간략한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무덤 주인공을 신라 이찬(신라시대 17관등 중 2관등)의 딸과 결혼한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으로 추정했다.

○ 가야 사회 순장의 흔적

고령 지산동 39호분에서 발견된 화살통 부속구. 높이 16.6cm의 금동제로 표면에 용무늬가 여럿 새겨져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지산동고분군 발굴사에서 가장 특별했던 무덤은 1977년에 발굴된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이다. 당시 정부는 가야문화권 유적 정화사업을 실시했고 이 사업에 지산동고분군 봉분 보수 건이 포함됐다. 우선 훼손이 극심한 두 개의 고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발굴을 담당한 경북대와 계명대 조사팀은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면서 조심스레 파 들어갔다. 두 무덤 모두 한가운데 유해와 부장품을 안치하려고 만든 큰 석실이 있었고 그 주변에서 자그마한 석곽이 하나둘씩 차례로 드러났다. 소형 석곽은 44호분에서 32기가, 45호분에서 11기 확인됐다. 조사원들은 석실과 석곽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소형 석곽에서 인골들을 수습했다. 44호분에서 출토된 백제산 청동 그릇과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패(夜光貝·자개 등에 쓰인 소라껍데기)로 만든 국자 조각은 당시 대가야의 외교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다.

조사단이 특히 주목한 것은 소형 석곽에서 수습한 인골들이었다. 그중 44호분 인골에 대한 감정 결과는 놀라웠다. 22구의 인골 가운데 다수는 20, 30대 남녀였지만 50대 남녀와 10대 이하 여아도 포함돼 있었다. 한 석곽에 남녀가 포개어 묻히기도 했고 여아 두 명이 합장된 사례도 있었다. 후속 연구에서 지산동 44호분은 6세기 전후 축조된 대가야의 왕릉이고 소형 석곽에 묻힌 인물들은 사후에도 왕을 모시기 위해 순장을 당한 이들로 확인됐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던 가야 사회의 순장 풍습은 이 발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최근 발굴에서 순장은 대가야뿐만 아니라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에서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단순함의 미학, 대가야 스타일

고대 사회 왕족은 고급 의복과 황금 장식을 통해 높은 지위를 드러내려 했고, 대가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가야 장신구 가운데 자체적인 양식이 눈에 띄는 것은 관과 귀걸이다. 대가야의 관이나 귀걸이는 주변국 장신구에 비해 단순한 편이다. 특히 관의 세움 장식(입식·立飾) 도안은 꽃이나 풀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전형적인 대가야 관은 지산동 32호분과 30호분에서 출토됐다.

1978년 계명대박물관이 발굴한 지산동 32호분은 도굴 피해를 입었지만 무덤 주인 발치 쪽 유물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곳에서 철제 갑옷과 투구, 각종 무기와 금동관이 출토됐다. 금동관은 주변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을 갖춘 것이었다. 1994년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한 지산동 30호분에서도 금동관 한 점이 출토됐다. 이 금동관은 지산동 32호분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대가야 양식을 지녔는데 크기가 매우 작았고 금동관 안에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들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현재 지산동고분군에 봉분을 갖춘 무덤은 704기가 있다. 근래 발굴 결과 땅속에 훨씬 더 많은 무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가운데는 대가야 전성기 무덤이 다수지만 일부는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한 이후 조성된 것도 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역사기록이 극히 부족한 현실에서 대가야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대가야사를 제대로 해명할 수 있을지는 이 고분군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얼마나 풀어낼 수 있는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기대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