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한화생명 신사업부문 마케터
‘오해’라는 단어 앞에 완벽하게 자유로운 이가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말과 문자의 틈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 그중 해소되지 못한 사소한 어긋남이 시간과 권태를 먹고 사람들의 입에서 무성한 오해로 자라난다. 그저 덜 자란 어른들의 치기로 여기기엔 성역이 없다. “누가 누구는 빼고 보자더라” 식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나 있을 법한 전언이 회사나 노인정에서도 버젓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오해 앞에 얼굴을 붉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이 모여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 ‘평판’을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억울한 것은 해명한다. 타인의 입에서 빚어지는 나의 얼굴이 내가 인지하는 내 모습과 가능한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 쉽지 않다. 오해라는 것은 애초에 그 재료는 나였을지언정 발단은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나를 둘러싼 모든 말들에는 나의 지분이 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여겼다. 포기하지 않고 말을 골랐고, 포기하지 않고 나를 말했다. 하지만 해소를 위한 노력마저도 최선을 다해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라면 제 기능을 잃고야 말았다. 배려하려던 마음은 위선으로, 적극적이던 행동은 건방으로 폄하됐다. 노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외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저 사람의 입으로 말미암은 천재지변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뒤로 나는 타인의 평가나 오해에 한결 관대해졌다.
타인의 면면을 온전히 아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모두 서로를 오해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인식은 나에 대한 오해의 총합이다. 어떤 오해는 황홀하고 어떤 오해는 불쾌하다. 어떤 오해는 과하고 어떤 오해는 박하다. ‘나’라는 사람의 같은 행동, 같은 말, 같은 특성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오해가 길항하며 공존한다. ‘자신감 있는 애’와 ‘잘난 척하는 애’, ‘붙임성 좋은 애’와 ‘염치없는 애’, 그 사이 어디쯤이 아마,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이 형성된 지점일 것이다.
나는 그냥 여기 있고 그것들은 저 너머 타인의 관념 속에서 피고 진다. 어차피 자력 밖의 일이라면 구태여 가장 나쁜 것을 끄집어 내 스스로를 할퀼 이유가 있을까. 어떤 오해에는 무책임해질 필요도 있다. 덧붙여 나를 오해하는 그 사람을 아마 나도 오해할 것이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그리 생각하면, 오해란 참 공평한 작용이 아닐 수 없다.
김지영 한화생명 신사업부문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