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족히 한두 시간은 거울 앞에 앉아있었을 듯한 ‘풀메(풀메이크업),’ 대회 때마다 달라지는 머리 색깔, 너무 길어 일상 생활에 불편을 초래할 듯한 인조 손톱….
마리화나 파문 후 NBC 뉴스 프로그램 ‘투데이’에 출연한 미국 육상 스타 샤캐리 리처드슨. NBC
미국 여성 육상선수 샤캐리 리처드슨(21)은 ‘블랙 글램(화려하게 치장한 흑인)’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입니다. 말도 당차게 잘 합니다. 자신을 “저 아가씨(That Girl)”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나를 주목해 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리처드슨처럼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언변도 뛰어난, 즉 상품적 가치가 높은 스포츠 스타를 좋아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선수들의 TV 출연이 붐을 이루고 있지만 미국은 스포츠의 엔터테인먼트화, 비즈니스화가 고도로 발전했습니다.
리처드슨은 최근 도쿄올림픽 대표 선발전 100m 결선에서 1등으로 골인했다가 도핑 테스트에서 마리화나 사용이 드러나 자격이 박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정신 건강 문제를 당당히 밝히면서 많은 미국인들의 공감을 사고 있습니다.
국민 청원도 뜨겁습니다. UADA,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세계반도핑기구(WADA) 등을 상대로 벌이는 리처드슨 지지 운동이 인터넷에서 여러 개 생겨났습니다. 시민단체 ‘무브온’이 조직한 가장 큰 규모의 40만 명 서명 운동 ‘샤캐리를 뛰게 하라’는 개시 하루 만에 33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리처드슨 지지 운동 ‘샤캐리를 달리게 하라’ 홈페이지. 시민단체 ‘무브온’ 홈페이지
불법 약물 사용은 스포츠 스타들에게 불명예의 극치인데 리처드슨의 경우는 왜 이렇게 동정론이 들끓고 있는 걸까요. 아직 미래가 밝은 젊은 선수라는 점, 경기 직전 오래 전 헤어진 친어머니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충격을 덜기 위해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안타까운 사연, 부인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순순히 “내 책임”이라며 시인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리처드슨은 마리화나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가족을 잃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이겨내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중요한 스포츠에서 자신의 허약한 멘탈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스포츠계는 “불굴의 투지” “정신력의 승리” 같은 ‘멘탈 갑’ 수사(修辭)들이 우리나라보다 덜 강조되기는 합니다만, 뛰어난 기량의 선수들이 많은 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부담감도 큽니다. 많은 선수들이 개인 사정에 관계없이 자신만만한 겉모습을 내보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지난 달 “몇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며 프랑스오픈 공식 기자회견을 거부해 벌금을 문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 지난해 US오픈 승리 때의 모습. NBC
이들의 호소가 공감을 살 수 있는 것은 불안한 정신 건강이 단순히 스포츠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MZ세대는 ‘우울증을 달고 사는 세대’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 조사에 따르면 MZ세대 중에서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가 “보통이거나 나쁘다”고 답한 비율은 27%인 반면 4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13%였습니다. “전문가로부터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MZ세대에서 70%가 넘는 반면 중장년층에서는 10~20%이었습니다.
“나에 대해 쉬운 판단을 내리지 말아 달라. 나도 사람이다. 내가 바로 당신이다. 단지 조금 빨리 달릴 뿐(Don‘t judge me because I am human. I am you - I just happen to run a little faster).”
리처드슨은 마리화나 사용 시인 직후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법 약물 사용은 분명히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지만 그녀만큼 많은 미국인들에게 정신 건강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스포츠 스타는 흔치 않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